우리는 바이러스와 살아간다

우리는 바이러스와 살아간다
2020년 1월 8일, 국내에서 코로나19 첫 번째 의심 환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공표되었다. 질병관리본부는 2015년 메르스의 급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나서 연구와 훈련을 거듭해왔다. 공교롭게도 20일 전인 2019년 12월 17일, 중국에서 들어올 가상의 바이러스를 지목해 도상훈련을 했다. 12월 훈련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 '배제 진단'을 통한 '판코로나 검사법'의 개발을 시작했고, 이 검사법으로 첫 번째 의심 환자를 검사했다. 1월 20일 질본은 대한민국에서 첫 번째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발생한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이재갑 교수는 2월 19일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두려워하기보다는 어떻게 이겨낼지를 고민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피해를 최소화하고 국민들을 보호할 수 있을지, 지금까지 고민했던 것을 바로 실행에 옮기겠습니다. 위기의 극복은 언제나 국민들이 움직였을 때 가능했습니다." 혼란과 불안이 가중하던 2월 말, 감염병 전문가들은 여러 차례의 토론 끝에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방역 당국에 적극적으로 권고했다.

드라이브 스루 선별진료소 아이디어는 대한감염학회 신종감염병위원회 정책태스크포스 단톡방에서 나왔다. 처음 아이디어가 나온 지 네 시간 반 만에 구체적인 방안이 공유됐다. 2월 23일 칠곡경북대학교병원에서 세계 최초로 드라이브 스루 선별진료소가 문을 열었다. 중증도에 따라 환자를 분류해서 중증 환자는 병원에 입원시켜 집중 치료를 하고, 경증 환자는 생활치료센터에 격리 조치하자고 했으나 중수본과 대구시가 난색을 보였다. 확진자가 증가하고 집에서 대기하다가 사망하는 환자들이 나오자 감염병 전문가들이 지속해서 건의를 했고, 3월 4일 첫 생활치료센터가 문을 열었다. 역학 조사관, 공공의료체계, 감염병 전문병원 등 숫자나 시스템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은 장기 계획을 세우고 예산과 인력을 계획하여야 한다. 그때그때 땜질하는 식으로는 감염병 유행에 대응할 수 없다.

정은경 청장이 직접 브리핑을 하는 것은 관료주의 때문이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때는 감염병관리센터장이 초기 대응에 실패하고 숨었다. 질병예방센터장이던 정은경이 차출돼 수습하며 대변인 역할까지 했지만 징계를 받았다. 정은경 본부장은 전임자가 문제를 일으키거나 부서에서 분란이 생기면 매번 그 자리로 가서 불 끄는 일을 했다. 코로나19 유행이 터지기 직전에 감염병관리센터장과 긴급상황센터장을 행정고시 출신으로 발탁했다. 브리핑은 긴급상황센터장이 담당하지만, 상황 파악은커녕 감염병 용어도 생소하니 정은경 청장이 직접 나섰다. 관료주의가 보건복지부와 질본에 팽배했지만, 한국은 정은경이 질병관리청장이라는 복을 받고 있다.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낸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가 '코로나 시대의 네 가지 계급'을 말했다. 첫 번째는 '원격 근무가 가능한 노동자(The Remotes)', 두 번째는 '필수적 일을 해내는 노동자(The Essentials)', 세 번째는 '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The Unpaid)', 마지막 계급은 '잊힌 노동자(The Forgotten)'이다. 바이러스는 영리해서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공격했다. 정신병원, 요양시설, 콜센터, 택배 물류센터, 교정시설 등에서 집단감염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바이러스는 사회 전체를 공격하지만, 취약한 곳에서는 똬리를 틀고 번식할 기회를 제공한다. 기본 소득 같은 새로운 제도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모색하고 시도할 때이다.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체계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해야 한다.

K-방역은 체계적으로 준비된 것이 아니다. 긴급 상황이 터지면 바로바로 대응하는 임기응변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의료진의 피와 땀 속에 생긴 희생들이 K-방역의 핵심이다. 여기에 사회적 거리 두기에 동참하는 시민의 자발성이 뒷받침하고 있다. 한국은 강제적인 봉쇄(lockdown) 없이 바이러스 확산을 막고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방역이 현실 정치와 맞물리면 상황을 어렵게 만든다. 정치는 대면 예배를 하는 교회에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한다. 2009년 미국에서 온 신종플루가 유행할 때 미국인을 입국 금지하자는 주장은 없었다. 그릇된 정치 세력과 편파적 언론이 근거 없는 혐오와 불안을 조장한다. 이재갑 교수는 열심히 일하고도 대한의사협회와 일부 언론에서 비선 자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시 코로나 이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사회적 거리 두기, 마스크, 손씻기를 실천하며 정은경 질병관리청장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다면 상황은 나아질 것이다. 뉴노멀에 맞는 사회 체계를 바꾸고 실천할 여유는 우리가 제일 먼저 확보했다. 바이러스 유행을 계기로 사회를 바꾸고 그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사회의 약한 고리를 어떻게 하면 강하게 만들지 고민하지 않으면 다음엔 더 호되게 당한다.

김혼비 작가는 "바이러스가 옮는다고 하더라도 원망스럽기는커녕 그 사람이 걱정될 그런 관계"인 사람만 만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약한 고리는 더 이상 타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제라도 모두가 함께 고쳐나가야 하며 그것이 바이러스가 그나마 허락한 짧은 반격의 시간 동안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다가왔다. 우리가 모색해야 하는 건 결국 함께 살아나가는 길이다."

우리는 바이러스와 살아간다/이재갑, 강양구/생각의힘 20200828 252쪽 15,000원


덧. 지난해 1월 20일 국내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후 1년이 지났다. 2021년 1월 20일 00시 기준 국내 확진자는 73,518명, 사망자는 1,300명에 달한다. 전 세계는 확진자가 9,610만 명, 사망자는 206만 명을 넘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