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스스로 길을 찾는다

역사는 스스로 길을 찾는다
  • '자본'의 세상이다. 모두가 자본 앞에 무릎 끊고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자본의 위세에 감히 덤벼들 엄두조차 못 내는 듯하다. 하기는 자본이 세상에 나온 이후 제대로 도전을 받아 본 적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자본은 인간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면서 힘을 보여 주었다. 짧은 시간에 이토록 세상을 변화시킨 자본은 대단한 '괴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더구나 자본은 자고 일어나면 모습이 바뀌니 따라잡기도 벅차다.

    자본의 역사를 들여다본 사람은 알겠지만, 자본이 여기까지 오는 데 신세(?)를 진 것이 있다면 바로 맑스주의와 공황이다. 맑스의 지적처럼 자본은 세상에 나올 때 온갖 오물을 뒤집어쓰고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억압과 착취를 먹고 산다는 게 알려졌다. '자본 사냥꾼'이 나타난 것은 당연하다. 바로 맑스주의다. 사냥꾼은 무기를 살피고 신발 끈도 단단히 맸다. 자본이 어떤 녀석인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밤새워 공부도 했다.

    (...) 자본은 경쟁하면서 살기 때문에 매일매일 단련된다. 또 변신에도 귀신이다. 한순간도 쉬지 못하고 경쟁하고 변신하기 때문에 자본 스스로도 숨이 턱턱 막힐 것이다. 하지만 자본은 동료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한편 사냥꾼과 몰이꾼에게 항상 쫓기는 형편이기 때문에, 강한 체력과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자본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데, 허점이 보이면 사냥꾼에게 발견되기도 전에 동료들에게 잡아먹히거나 산 아래로 쫓겨 날 수도 있는 것이다.

    자본을 강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계기는 주기적으로 체력을 보강해 주는 공황이다. 유기체가 생명을 이어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가끔 몸져누워서 불필요한 것들을 털어 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골골 팔십이라더니, 주기적으로 폭발하는 공황은 자본이 숨기고 싶은 고질병이지만 공황 덕분에 몸도 추스리고 군더더기도 정리하게 된다. 공황이 폭발한다고 자본 때문에 사냥꾼이 신날 것은 없지만, 자본의 한계는 명확히 보게 된다.

    (...) 눈치 빠른 자본은 사냥꾼을 비웃기라도 하듯 추파를 던지거나 유혹도 한다. 결코 잡히지 않는다는 자신감이다. 자본은 사냥꾼이나 몰이꾼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오만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사냥꾼은 자본을 잡으려고 태어났기 때문에 사냥을 멈출 수 없는데, 좀처럼 잡히질 않으니 걱정 끝에 머리도 맞대고 무기도 손질해 보지만, 한편 자본이 두렵기도 하다. 이것이 자본의 역사다.

    (...) 이제는 '자본 사냥꾼'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지 않다. 더구나 그 사냥꾼이 자본을 잡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물론 자본을 잡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잡았다던 자본을 어느 순간부터 닮아가는 것을 보면 혼란만 부채질한 꼴이 되었다. 이러한 '자본 사냥꾼'들과 함께하면서도 언제나 깨어 있던 사람이 바로 로자 룩셈부르크다. 사냥꾼에게도 급수가 있다던가. 그녀는 자본 사냥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다. (7~9)

  •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개량을 단지 장기적으로 조금씩 달성해 가는 혁명으로 생각하고 혁명을 단기적으로 농축된 개량으로 보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다. 개량과 혁명은 시간의 길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서 특성이 서로 다른 계기다. ... 따라서 정치권력의 장악과 혁명 대신에 개량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같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조용하며 확실하고 시간이 걸리는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전혀 다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13)

  • 룩셈부르크는 혁명과 개량의 문제에 대하여 탁월한 변증법적 논쟁 능력을 발휘했다. 혁명과 개량은 역사 발전의 두 갈래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사회의 발전에서 서로를 제약하고 보완하는 동시에 배타적인 것이다. 합법적 제도와 장치라는 것은 모두 혁명의 산물이며 혁명은 계급의 역사에서 정치적 창조 행위인데 반해, 개량을 위한 노력은 지나간 혁명에 의해 창조된 사회형태의 구조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개량을 단지 장기적으로 조금씩 달성해 가는 혁명으로 생각하고 혁명을 단기적으로 농축된 개량으로 보는 것은 근본적 오류다." 룩셈부르크에게 혁명과 개량은 공통적 목표를 가지고 지름길이나 또는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전혀 다른 목표로 가는 것이다. (24)

  • 자본주의는 놀라운 번식력을 갖는 최초의 경제체제다. 즉 세계 구석구석에 침투하면서 다른 모든 경제체제를 축출해 버리는 최초의 경제체제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또하 자신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제공할 다른 경제체제가 없다면 독자적으로 존속할 수 없는 최초의 경제체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세계적 경제체제로 발전함과 동시에 세계적 경제체제가 될 수 없는 자신의 내적 모순 때문에 파멸해 가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모순이다. 자본축적 과정이란 모순을 해결하는 동시에 모순을 잉태하는 과정이다. 자본주의가 최첨단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이 자본축적의 모순은 사회주의 원리를 적용하지 않고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다. (56)

  • 자본주의 질서의 폐지, 사회주의 질서의 실현 ... 이 역사적 과업은 위로부터 즉흥적으로 내려오는 몇 마디의 공약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도시와 농촌에서 신음하는 대중의 의식적 행동에서 출발하여 일반 대중의 지칠 줄 모르는 이상과 고도로 성숙된 지성에 의해 폭풍우를 뚫고 안전하게 항구에 정박할 때 가능한 것이다. (124)

  • 자본축적이란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비자본주의 생산양식 사이에서 진행되는 신진대사다. ... 따라서 자본축적은 비자본주의적 영역이 없으면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으며 한편으로 자본주의가 팽창할수록 비자본주의적 영역은 사라져 가는 것이다. (163)

  • 프로레타리아혁명은 소수가 폭력적 방법으로 자신의 이상에 맞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운명적 시도를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역사적 소명을 다하기 위해 또한 역사적 필연성을 역사적 현실로 바꾸어 놓기 위해 부름을 받은 수백만 대중 일반의 깨달은 행동일 뿐이다. (203)

  •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혁명을 위해 대중의 자발성과 혁명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민주주의를 비타협적으로 고수하게 된 것인데,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분출될 수 있도록 열어 주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이해했다. 특히 혁명 이후에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비타협적으로 전면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민주주의를 혁명을 방어하고 전진시키는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한 것이다.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하려면 수 세기에 걸친 부르주아지의 계급 지배로 황폐해진 노동자계급의 정신적 변화가 필요하며, 그 이유는 바로 제한 없는 민주주의를 통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활동이 자유롭게 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또한 민주주의를 통해 대중의 창조적 주도권이 강화되면 관료제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236)

  • 자본의 출현이 역사의 필연이라면 노동자가 자본의 무덤을 파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보면서, 역사적 변증법은 모순 가운데 운동하면서 모든 필연에 대해 그 대립물도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다. 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불평등이 노동자 대중의 자발적 봉기를 부른다는 것이다. (244)

  • 사회적으로 가르침을 통해서 형성된 실천 능력이 혁명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역사적 임무를 수행할 계급을 역사의 맥락에서 찾는다면, 봉건제 사회가 잉태했지만 봉건제 사회와 공존할 수 없었던 부르주아가 수행했듯이 자본주의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겠지만 자본주의사회와 공존할 수 없는 계급일 것입니다. 바로 자본 관계에서 잉태되었지만 자본에 포섭되진 않으면서 자본 관계 밖에 있는 계급 말입니다. (...)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혁명은 자본 관계에서 잉태되었지만 자본 관계에서 살아갈 수 없는 계급이 주체라고 생각됩니다. (283)

  • 당신의 혁명 노선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노동자 대중이 스스로 생존을 위해 저항하는 것과 혁명하는 것을 구별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의문입니다. 자본주의가 과도기 사회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궁금할 것도 없습니다. 대중의 삶은 자본 관계에 묶여 있어서 그것을 넘어 사고하고 행동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노동자 대중도 농노처럼 자신의 삶을 지키거나 바꾸기 위해 저항하고 투쟁하지만, 그들도 궁극적 목표는 알 수도 없고 궁극적 목표에 관심도 적을 것입니다. (...)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계급과 대중의 끊임없는 투쟁은 역사가 "새로운 계급"을 만드는 데 커다란 힘이 될 것입니다. 역사가 걸음을 멈춘 적이 없듯이, 역사가 스스로 길을 찾는다면, 자본주의는 곧 과거의 사회가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글을 마칩니다. (284)

역사는 스스로 길을 찾는다/이갑영/박종철출판사 20190115 288쪽 20,000원

로자 룩셈부르크(18710305~19190115)의 100주기를 맞아 학문적 업적과 혁명 이론을 되돌아보며 이갑영 교수의 글을 엮고 박종철출판사에서 책을 펴냈다.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태어난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년 1월 옛 동지였던 독일사민당에 의해 살해된 경제학자이자 혁명가였다. 칼 마르크스 이후 '최고의 사상가'로 불리며 불꽃처럼 살다 갔다.

룩셈부르크는 맑스주의 역사에서 극과 극을 오가는 평가에 시달렸다. '자본주의의 자동 붕괴만 기다린 '기계적 유물론자'로 이해되거나, 사회주의혁명을 대중의 자발성에 맡겨 버린 '주의주의자'로 비판(209)'을 받는다. 레닌과 맞수였지만 꺼진 불꽃인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현실을 역사적으로 인식하라는 교훈을 남겼다. 관료화된 노동조합은 역사적 필요악이라고 비판했다. 지금 노동자는 자본과 갈등하는 공생 관계로 전락했다. 정규직 노동자는 자본에 포섭되어 귀족노동자와 노예노동자로 나눴지만, 노동의 계급화는 오히려 새로운 계급을 잉태하고 있다. 새로운 노동계급은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오늘날 절실히 되새겨야 할 문장을 추렸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모순이 스스로 만든 대안이다. 자본주의가 선해지길 기다리느니 선제적이고 혁명적으로 시도하는 사회가 지속 가능한 미래사회가 될지도 모른다.


덧. 오탈자(?)
  1. 7쪽 2행 무릎 끊고 → 무릎 꿇고
  2. 8쪽 14행 추스리고 → 추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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