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렛 걸과 인도네시아 1965년 대학살
우리는 모두 부끄러운 과거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상처라고 부른다. 나는 그것을 교훈이라고 부른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거울로 삼고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모습까지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히 그곳에는 더 나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인도네시아 드라마 〈시가렛 걸 Cigarette Girl, 2023〉을 봤습니다. 담배 조향사를 꿈꾸는 가내수공업 담배공장의 장녀 디시야(디안 사스트로와르도요 Dian Sastrowardoyo 扮)와 사업 수완이 뛰어난 수라야(아리오 바유 Ario Bayu 扮)가 첫눈에 반해 사랑하다 헤어지고 그리워하다 다시 찾는 내용입니다. 두 연인이 헤어지는 결정적 사건이 되는 드라마 배경이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1965년 10월1일 인도네시아 장군 6명과 장교 1명이 반란군에게 납치·살해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9·30 쿠데타'로 부르는 사건입니다. 군부 실력자였던 수하르토 당시 육군참모차장은 공산당 소행이라고 선전하며 역쿠데타를 일으켜 순식간에 좌익 군인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잡았습니다. 10월부터 대대적인 공산당 숙청을 시작했습니다. 군부와 무장한 극우 무슬림 민간 조직은 학살과 숙청을 자행했습니다. 공산주의자, 좌익민족주의자, 중국계 화교는 물론 지주, 농민, 교사, 노동자, 빚쟁이, 경쟁 사업가 등을 빨갱이로 지목하여 재판도 없이 고문하거나 죽였습니다.
1965~1966년 사이에 살해당한 사람들이 50만 명이라고 하지만, 100만 이상 300만 사이로 추정합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수하르토는 1967년 대통령이 되어 1998년까지 독재 정치를 했습니다. 당시 집권층은 지금도 영웅 대접을 받습니다. 쿠데타와 대학살 배후에는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이 있다는 정황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액트 오브 킬링 The Act of Killing, 2012〉은 1965년 대학살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1965년 대학살은 〈시가렛 걸〉에서 두 연인이 헤어지는 시대적 배경입니다. 디시야 가족이 빨갱이로 지목당하며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그래도 군 장교 세노(이브누누 자밀 Ibnu Jamil 扮)는 디시야와 가족들을 보살핍니다. 첫머리에 인용한 대사는 디시야의 딸이 얽히고설켰던 비극적인 가족사를 알게 된 후에 디시야의 초라한 무덤 앞에서 하는 말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역사를 잊어버려 비극이 되풀이된다는 뜻입니다. 제주 4·3사건, 국민보도연맹학살, 5∙16쿠데타, 12·12군사반란과 5·18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지금은 띨빵하고 굥스러운 검란시대(檢亂時代)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