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모노, 당신은 바나나 우유인가 바나나맛 우유인가?

혼모노
신애기1가 앞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삼십년 차 박수무당인 문수는 심기가 불편하다. "편의점 가판대 앞에서 바나나 우유와 바나나맛 우유는 뭐가 다른지 한참 고민하는데, 옆에서 누가 하나 남은 바나나 우유를 쏙 채간다.(133)" 바나나 우유마저 빼앗기고 별수 없이 바나나맛 우유를 집어들었다. 문수가 모시던 장수할멈이 떠나자 신령들도 떠났다. 신애기는 바나나 우유를 마시고 문수는 "바나나맛이 나지만 바나나는 아닌 우유(135)"를 마신다. 장수할멈이 신애기로 옮겨 붙었기 때문이다.

문수는 삼십년을 모신 장수할멈이 떠났지만, 목단을 제단에 올렸다. 생전에 할멈은 지화(紙花)가 아닌 생화만 좋아했다. "혼모노라면 환장(137)"했다. 신통했던 장수할멈은 혼모노2였지만 "존나 흉내만 내는 놈(120, 154)"이었던 문수는 니세모노3 박수무당이었다. 신빨이 다한 문수는 혼모노 목단을 넣은 화병을 집어 던졌다. "지금 나를 향해 조소하는 것이 할멈인지 저 애인지, 허깨비인지 인간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145)" 모른 채 작두를 탔다. 소설 〈혼모노〉 속 박수무당 얘기다.

소설집 《혼모노》에는 순도 높은 사랑이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65)"로 변하는 〈길티 클럽: 호랑이 길들이기〉, "무인도에서 구명보트를 발견한 기분(90)"처럼 아주 좋은 하루(?)일지도 모르는 〈스무드〉, "뜨거운 딤섬을 차마 삼키기도 뱉지도 못한 채(240)" 머금고 있는 〈우호적 감정〉, 지지4라는 말을 끔찍이 싫어하는 연리목집 며느리가 하소연하는 〈잉태기〉, "은빛 비늘을 품은 대어일지, 다 녹슨 해양 쓰레기일지(332)" 모르는 〈메탈〉 이야기가 있다.

특히 인간을 중시하여 "채광과 통풍에 신경(169)" 쓰는 건축가가 인간을 위한 공간을 설계하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는 그럴듯하다. 갈월동 98번지에 세워진 경동수련원은 수련원이 아니라 '구의 집'으로 불리는 고문했던 건물이다. "희망이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192)"이라는 걸 알고 수직 창을 설계했다. 수직 창은 "단 십분만 빛이 들어오도록 치밀하게 설계(192)"했다. 세월이 흘러 "구의 집의 '구'가 두려워할 구(懼)인지, 구원의 구(救)인지, 혹은 그저 자신의 성을 딴 것인지(201)" 다 늙은 건축가 구보승은 여전히 모른다. 정말 그럴듯하다. 그럴듯하다는 말은 역사의 빈틈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채운다는 뜻이다. 취향에 맞아 더 재밌게 읽었다.

소설들은 무슨 일이 이어지려는 순간에 끝난다. 마지막 마침표가 찍혔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상(理想)과 이상(異常) 사이를 넘나들며 상상하게 만든다. 소설에는 모두 진짜와 가짜가 등장한다. 진짜라고 여기는 인물은 바나나 우유를 마시고 가짜라는 인물은 바나나맛 우유를 마신다. 둘 다 바나나는 들어있지 않은 가짜인데 대부분 바나나 우유를 고른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린다. 세상이 그렇다. 모든 현상을 덩어리로 보면 더 그렇다. 혼모노인지 니세모노인지 세심하게 볼 일이다.

"문학의 힘은 침묵으로 남을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문학은 항상 예외의 자리에 있다. 문학은 한 사람을 주목하고 천천히 가는 것이다." 성해나 작가의 말5이다. 매력적인 오독으로 답하는 것은 독자의 특권이라고 덧붙였다. 바나나 우유와 바나나맛 우유 앞에서 멈칫한다.

혼모노/성해나/창비 20250328 368쪽 18,000원


  1. 신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무당을 일컫는 말
  2. ほんもの. 本物, 진짜 물건. 이 부분은 각주를 달지 않았다. 혼모노가 무엇인지 독자 상상력에 맡기려는 뜻으로 보인다.
  3. にせもの. 偽物, 가짜. 여기서는 '선무당'을 가리킨다.
  4. 지지한다와 일본말로 할아버지라는 이중 뜻
  5. 북토크에서 문학에 대해 성해나 작가가 한 말이다. 작가의 부모님은 운동권이었고, 이청준 작가를 좋아하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전태일 열사를 꼽았다. 지금은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장편소설을 집필 중이라고 한다.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364)"라며 《혼모노》를 극찬한 박정민 배우는 무명기에서 꺼내준 귀인이지만, 출판사 무제랑 계약한 지금은 마감의 짐이 됐다고 해서 모두 웃었다. 성해나 작가는 사인받는 독자에게 진심이었다. 끄트머리에서 두 번째로 받았는데도 지친 기색 없이 어떤 소설이 좋았냐고 묻고 환하게 웃으며 사인해 줬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