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 과연 나는 이 지구에 머물 재능이 있을까? 그 재능은 어쩌면 '집요하고 끈질기게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가, 성공을 위해 과감하게 결단할 수 있는가'보다는 '지금까지의 내 방식을 버리고 세상의 아름다움에 젖어들 수 있는가'로 판가름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의 성패가 아니라 제대로 쉴 수 있는지 여부로 말이다. 가만히 두면 마음은 금방이라도 계획과 근심의 세계로 달아날 것처럼 날뛴다. 행복을 현재에 단단히 묶어 두기 위해선 제대로 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23)
  • 멈춘다는 것은 주류를 이루는 가치에 '정말 그런가?' 하고 의문을 던지는 것이며, 엄숙함을 가장한 가짜 권위를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멈춤은 기득권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도전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그들은 세상이 그럭저럭 이 상태 그대로 돌아가길 바란다.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세력에겐 사람들이 멈춰 서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다. (41)
  • "사랑이란 슬픔 속에서도 의연하게 이해하고 미소 지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헤르만 헤세가 한 말이다.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집념이 강하다고 말해준 엄마가 생각난다. 의연하게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상대의 모든 면이 마음에 들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 안에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있기에 의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못난 점도 가볍게 받아들여 끌어안을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있다. (72)
  • 혼자 자겠다고 하던 그밤처럼 살아. 그때 자네가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거나 눈치를 보지 않아서 좋았어. 사람들은 생각만큼 다른 사람 사정에 큰 관심 없어. 그런데 늘 남이 어떻게 볼까, 재다가 일생을 보내지. 그러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때가 와서야 후회하지. 좀 더 나답게 살아도 좋았을 걸 하고 말이야. (119)
  • 나는 실수라는 명사에는 '배우다'라는 부담스러운 동사보다 '만나다'라는 동사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실수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 만난다. 대부분의 실수는 몰라서 저지른다. 부주의 때문에 생긴다. 자신을 모르고, 자신과 타인의 욕망을 모르고, 자신이 언제든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간과한 결과 일어난다. (142)
  • 그래도 인간에게 끝까지 가 볼 권리가 있다는 것, 그걸 시도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사실이 나는 미치도록 좋다. 굳이 어디에 도착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가 보는 것이다. 그저 해 보는 것이다. 세상에 무익한 일이란 없다. 올바른 관점만 지닌다면 모든 일이 행복을 발견하는 오솔길로 이어진다. 아, 굳이 행복해지거나 성장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도 없다. 끝까지 가 본 경험은 그 자체로 눈부신 생의 선물이 되어 생존이 아니라 진정한 여행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도와준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161)
  • 심심한 시간은 무엇인가를 우격다짐으로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비우고 또 비워 내는 고독한 순간이다. 사회가 강권하는 통념을 의심해 보고, 승자독식주의가 자아내는 초조함을 비우고,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막막함마저 비우는 시간.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가장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것들은 바로 그 지루한 시간들을 거친 뒤에야 나온다. (175)
  • 폭설 때문에 한 달 동안 산장에 갇혀 있으면서 1300쪽에 이르는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고 또 읽었다는 어느 산장지기의 고백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언젠가 그런 때가 올 경우를 대비해 나는 270쪽 분량만 읽어뒀다. 고전을 아낄 권리도 있는 법이니까. (195)
  • 우리가 '성공'으로 정의하는 것은 우리의 나이와 상당 부분 관계가 있습니다. 인생은 돌고 돕니다. 한 살짜리 아기의 성공은 대소변을 가리는 것이고, 25세에는 성행위, 50세에는 돈이 성공이며, 75세에는 여전히 성행위를 하는 것이, 그리고 90세에는 다시 대소변을 가리는 것이 성공입니다. (203)
  • 모든 반복은 지겨움이라는 필연적인 결과를 빚지만 걷기만은 예외이다. 걷기의 반복은 활기찬 중독으로 이어진다. 걷기는 환경에 주는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세계를 친근하게 알아 가는 수단이다. 인간의 권리장전 중에 윗부분을 차지해야 마땅할 걷기. 똑같은 길도 날마다 다르게 변주되기에 어제의 그 길이 아니다. 걸으면서 나는 어제의 나, 한 발을 내딛기 직전의 나와 흔쾌히 결별한다. (210)
  • 돌과 씨름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돈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반드시 인생에서 패배자라는 뜻은 아니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 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일 수 있다"고 말했다. (218)
  • '생각하지 않을 권리'라고 해서 문제에서 달아나거나 책임을 회피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적 태만이나 무관심을 정당화하려는 주장도 아니다. 생각하지 않을 권리를 달리 표현하면 생각을 비울 권리가 될 것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기존의 가치에 괄호를 치고 원점에서 재점검해 볼 권리, 다시 말해 타성에 젖은 생각에서 자유로울 권리'인 것이다. (244)
  • 알면서 속아 주는 일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공감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그런 처지에 놓일 수 있다는 역지사지 정신을 잊지 않을 때 가능하다. 요즘 세상에는 이런 마음의 여유를 지니며 살기가 쉽지 않다. 같은 물건을 두고도 더 싸게 산 사람이 있으면 속이 쓰린 게 사람 마음 아니던가. (256)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정희재/갤리온 20120823 288쪽 13,800원

"내 그림을 내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유감이군. 그러면 완전히 자급자족이 될 텐데(106)." 고흐 말처럼 누구나 자급자족을 꿈꾸지만 그렇지 못해 "사람은 가진 것으로 제사 지낼 수밖에 없(31)"는 것이겠지요. 사람은 "일과 사랑, 그리고 상상력(231)"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상상력이 없어도 살아갈 수는 있지만 세상은 더 이상 풍요롭지 않을 겁니다. "상상력이란 다른 말로 희망을 품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232)"이니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란 내 자신의 가치와 신념이 아닌 사회가 강요하는 트렌드나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이야말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인생을 버틸 수 있는 여유와 창의력을 길러 준다(7). 고로 '나는 몽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235).'

우주 헌법 1조는 "모든 생명은 멍때릴 권리가 있고, 모든 존재는 무조건 협조해야 한다"로 해야 합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