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 유진목

당신이 죽고 난 뒤로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거기에는 당신의 물건들이 놓여 있다

어떤 것은 나대로 사용할 것이고
어떤 것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은 끝내 찾지 못해서
방에 앉아 울었다

내가 죽고 난 뒤로
방은 완전히 비어 있다

이 책은 돌아와 마저 쓰인 것이다

연애의 책/유진목/삼인 20160515 108쪽 8,000원

엄마는 내가 제일 처음 떠나 온 주소입니다1

전말은 알 수 없고 절망이 길어진다 가망이 없더라도 희망의 용법을 구한다2

매일같이 당신을 중얼거립니다 나와 당신이 하나의 문장이었으면 나는 당신과 하나의 문장에서 살고 싶습니다 몇 개의 간단한 문장 부호로 수식하는 것 말고 우리에게는 인용도 참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3

어디로 가야 당신을 볼 수 있습니까 모든 게 다 당신이야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당신에게만 있는 것이 고맙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 내가 그리로 가겠습니다4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을5

그래도 삶은 사랑은 낡아진 속옷 모양 푹 푹 뜨거워지니 너무 오래 붙들었나요6

어제는 사랑이 처음 배운 단어인 것처럼 고백이 하고 싶었어요7

질문이 많은 자는 살인을 할 수 없으니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8

불행한 사람에게 어떻게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9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은 이 시집을 "한국 최고의 연애시집"이라고 평했다. 최고의 연예시집은 아닐지 모르지만 열 몇 권쯤 되는 사랑을 잘라내고 도려냈을 사연이 선명하다. "당신이 있고 쉼표가 있고 그 옆에 내가 있는 문장 나와 당신 말고는 누구도 쓴 적이 없는 문장을 더는 읽을 수 없는 곳에서 나는 깜빡이고 있습니다.10"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절망에게 지는 것이다.


  1. 반송
  2. 타전의 전말
  3. 당신, 이라는 문장
  4. 첩첩산중
  5. 잠복
  6. 부재중 통화
  7. 어제
  8. 매장
  9. 밝은 미래
  10. 당신, 이라는 문장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