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 애초에 이 풀도 요 풀도 아니었던 제3의 풀, 그 무고한 희생은 얼마도 되는지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다만, 초여름의 햇살 아래서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왠지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단호함과 성실함을 탑재한 법조인들이 무언가에 대해 확고한 기준을 갖는다는 것이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새 어떤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은 무서운 일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어느새 말끔하게 정리된 잔디밭을 돌아보았던 생각이 난다. 어찌 되었든 잔디밭은 모두 정리되었다. (23)
  • 열심히 한다는 것은 그저 일을 많이 한다는 것이 아니라 뜨겁게 한다는 뜻이다. (62)
  • 재판을 받는 누군가와 함께 운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형사 법정에서 펼쳐내는 생의 어떤 비극적 단면에 대해 함께 공감하고 진동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고 멋진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67)
  • 상상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가늠할 수 없으므로 속수무책인 것이 법조인들이었다. 법조인들은 그들이 상정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해서만 무게를 달 수 있는 저울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100)
  • 변이하는 과정에 있는 존재는 물컹하다가 딱딱해지고 예민하다가 부드러우며 자기도 자기가 뭐가 되는 것인지 몰라 불안한 존재다. 그 변이의 과정에서 나의 민원인들은 끊임없이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하며 나와 함께했다. 어떤 날은 화를 내고 어떤 날은 그들을 달래면서 실은 나도 위로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상의 모든 요구에 답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답이 아니라 다만 관계로서만 존재하는 요구도 어딘가에는 있다는 사실, 우리는 서로 답답하고 복장 터지는 관계였지만 어쩌면 그 시절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유일한 벗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15년쯤 지난 어느 날 해보는 것이다. (124)
  • 과거에는 그래도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서는 모종의 기술이나 재능이 필요했다. 사기를 치려는 자는 남들보다 빼어난 말발이나 연기력이 필요했고, 절도를 하려고 해도 담을 넘거나 문을 따는 기술 정도는 있어야 했다. 폭력배가 되기 위해서는 남다른 혈기와 피지컬이 뒤따라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하철 성추행은 몸 가진 자, 손 가진 자라면, 간단히 손만 뻗어 저지를 수 있다. 그야말로 범죄의 평준화라 할 만하다. (157)
  • 석순이란 건 그러니까 몇 가지 원칙으로 정해둔 서열이다. 가장 우선되는 기준은 연수원 기수, 그다음으로 사법시험 기수, 임관 연도, 나이순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 전국의 모든 검사는 한 줄로 세울 수도 있다. (...) 이 명확하고 확고한 원칙은 거의 예외 없이 여기저기 적용이 되다 보니 그것은 다만 어떤 원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218)
  • 주차조차 가장 좋은 자리에는 하지 못하는 나를 친구들은 외곽주의자라고 불렀다. (267)
  • 외곽주의자는 다만 원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한 주변인이 아니라, 스스로 찾은 외곽의 어느 지점에 머물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자다. (271)
  • 외곽주의자라는 것은 하나의 이념이라기보다 어떤 취향에 가깝다. 중심을 거부하겠다는 높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체질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복잡한 곳, 핫한 곳, 관심이 집중되는 곳, 가장 높고 가장 비싼 곳이 조금 불편할 뿐이다. 그 불편함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겠다는 다소간의 고집이 외곽주의의 실체다. (273)
  • 일말의 현실 인식 덕분에 나는 국숫집 주인의 꿈을 가슴 한편에 품은 채 국가의 녹을 먹는 법률 노동자가 되었다. (288)
  • 다만 그 와중에도 꿈이 있다면, 내가 국수 대신 세상에 내어놓기로 마음먹은 법률 서비스가 간혹 누군가에게 한 그릇의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힘들고 지친 인생을 한방에 일으킬 수 있는 보양식은 아닐지라도, 힘을 내기 위해 무언가를 찾아 나설 힘조차 없는 어느 허기진 저녁에 한 그릇 끼니는 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힘들이지 않고도 후루룩, 입과 빈 위장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그 잠시의 위로를 딛고 또 다른 무언가를 위해 나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에너지원인 그 무언가가, 매번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되기도 했으면 좋겠다. (289)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정명원/한겨레출판 20210709 324쪽 15,000원

저자는 원의 중심인 특수부나 공안부가 아니라 형사부와 공판부라는 외곽을 떠도는 '통상 업무를 안정적으로 수행하나 플러스알파가 부족한' 법률 노동자인 검사입니다. 외곽주의자이면서 두 아이를 둔 검사 엄마이기도 합니다. 비둘기를 보면 발가락을 먼저 보던 고시생 시절의 마음은 결코 변하지 마세요.

1층에서 국수를 팔고 2층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어 '위로받는 사람들의 국숫집' 주인이 되는 꿈을 이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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