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의 길 -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Cannibal Capitalism, 2022
  • 전반적으로 우리에게는 우리 시대에 부합하는 자본주의 및 자본주의 위기의 개념들이 별로 없다. 나는 이런 개념의 하나로 '식인 자본주의'를 주창한다. (30)
  • 착취와 수탈 모두 축적에 기여하지만 그 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착취는 자유 계약에 따른 교환으로 위장한 채 가치를 자본에 이전시킨다. 즉, 노동자는 노동력 사용 대가로 임금을 받아 생활비를 충당하고, 자본은 '잉여노동시간'을 전유하는 한편 '필요노동시간'만큼만 급여를 지불한다. 반면에 수탈의 경우에는 자본가가 타인의 자산을 (대가를 거의 혹은 전혀 지불하지 않은 채) 폭력적으로 징발하는 쪽을 선호하기에 이러한 온갖 세심함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즉 강제 노동, 토지, 광물, 에너지를 기업 활동에 몰아줌으로써 기업의 생산비를 낮추고 이윤을 늘린다. 이렇듯 수탈과 착취는 서로를 배제하기는커녕 손잡고 함께 간다. (51)
  • 자본주의가 경제적 시스템도 아니고 윤리적 삶의 사물화된 형태도 아니라면, 그럼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자본주의를 '제도화된 사회 질서an institutionalized societal order'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이해라는 게 나의 답이다. 이를테면 봉건제 같은 하나의 사회 질서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58)
  • '수탈'이 자본주의에 구조를 부여하는 요소라는 정의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보자. 앞장에서 본 대로, 수탈은 다른 수단을 통한 축적이다. 즉, 착취와는 다른 방식을 통한 축적이다. 자본이 임금을 대가로 '노동력'을 구매하는 계약 관계 대신 수탈은 인간 역량과 자연 자원을 징발하여 자본 확장 회로에 징용함으로써 작동한다. 징발은 신세계 노예제에서 그랬듯이 뻔뻔스럽고 폭력적일 수도 있고, 우리 시대의 약탈적 대출과 담보물 압류에서 그렇듯이 상거래라는 베일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 또 수탈당하는 주체는 자본주의 주변부의 농촌이나 토착민 공동체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 중심부의 종속 집단이나 하위 집단 구성원일 수도 있다. (85)
  • 수탈과 착취의 구별은 경제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다. 경제적으로 봤을 때 두 용어는 (분석상으로는 구분되지만) 서로 뒤얽혀 가치를 확대하는 '자본 축적' 메커니즘들에 붙여진 이름이다. 반면 정치적으로 봤을 때는 '지배' 양식과 관련된 용어들이다. 특히 권리를 보유한 개인·시민과, 예속민·부자유한 노예·하위 집단의 종속적 구성원을 구별하는 지위 위계제와 관련된다. (89)
  • 자본주의 사회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자신을 재발명했다. 특히 다양한 모순들(정치적·경제적·생태적·사회 재생산적)이 수렴하는 전반적 위기 국면에는,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제도적 분할이 이뤄지는 장소에서 경계투쟁이 분출했다. 그 장소란, 경제가 정치와 만나고, 사회가 자연과 만나며, 수탈이 착취와 만나고, 생산이 재생산과 만나는 곳이다. 이러한 경계선에서 사회적 주체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제도적인 지형을 재편하기 위해 세력을 결집했다. (145)
  • 자본은 노동과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도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 관계는 식인적이고 추출적인 관계다. 더 많은 '가치'를 쌓아올리기 위해 더 많은 생물물리학적부를 먹어 치우면서도 생태적 '외부성externalities'에 대한 책임은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와 동시에 필연적으로 쌓아올리는 게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은 더욱더 산처럼 솟아오르기만 하는 생태-피해다. (164)
  • 정당하고 효과적인 공적 권력은 자본 축적이 지속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하지만 자본의 무한한 축적 충동은 자신이 의존하는 그 공적 권력을 오랜 시간에 걸쳐 불안정에 빠뜨리는 경향이 있다. 이 모순이 현재 민주주의 위기의 근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또 한 가지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또 다른 곤경들과 긴밀히 얽혀 있으며, 그것만 따로 떼어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226)
  • 근대사에서 전반적 위기가 사회의 재편을 초래한 과정이 몇 차례 있었고, 대개는 자본에게 이익을 안겨주는 결과로 끝이 났다. 이런 과정들을 거치며 자본주의는 자신을 거듭 재발명했다.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은 수익성을 회복하며 저항 세력을 길들이려고 애쓰는 가운데 경제/정치 분할을 재설정했다. 그리고 이 두 '관할영역'뿐만 아니라, 두 영역이 제3항, 즉 사회적 재생산, 비인간 자연, 인종, 제국 등과 맺는 관계 역시 재편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치적 지배 양식만이 아니라 착취와 수탈의 기존 형태도 재조직했다. 이에 따라 계급 지배와 지위 위계제만이 아니라 정치적 예속까지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다. (255)
  •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주기적으로 촉발하는(그러나 시원히 극복하지 못하는) 교착 상태에 대한 대응이고, 자본주의에 너무도 깊이 뿌리박고 있는(그래서 그 안에서는 결코 근절될 수 없는) 지배 형태에 대한 대응이다. 달리 말하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질병을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264)
  • 코비드-19의 발생은 이 얽힘을 증명하는 교과서와도 같은 사례를 제공한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2022년 4월 현재, 팬데믹은 식인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이 수렴하는 지점이 되고 있다. 즉 자연, 돌봄 활동, 정치적 역량, 주변부 민중을 둘러싼 제살깎아먹기가 죽음을 부르는 난장판으로 융합한다. 그야말로 자본주의 기능 장애의 광란의 파티인 코비드-19는 이 사회 시스템을 폐지해야 한다는 요청에서 단번에 모든 의심을 벗겨버린다. (292)

좌파의 길Cannibal Capitalism, 2022/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장석준 역/서해문집 20230205 336쪽 19,500원

자본주의가 돌아왔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사회주의도 돌아왔다는 것으로 끝난다. 자본주의가 돌아왔다는 말은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을 걱정하며 비판을 전개하는 걸 의미한다. 자본주의 위기의 표식이다. 저자가 말하는 자본주의는 경제 유형만이 아니라 사회의 유형을 가리킨다. 봉건제와 같은 하나의 사회질서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 위기의 개념으로 지금을 식인 자본주의라고 명명한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가 식인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교과서였다. 자연, 돌봄, 인종 등을 착취하고 수탈하며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자본주의 경제가 제 배를 채우기 위해 가족과 공동체, 생활 터전, 생태계의 피와 살을 다 빨아먹어 버리는 현실"이었고, "자신을 지탱해주는 사회·정치·자연의 토대를 먹어 치우느라 여념이 없는" 식인 자본주의의 모습이었다.

식인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사회주의 재발명을 제시한다. 자본주의를 경제로만 관점을 폐기했듯이 사회주의 역시 대안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확장된 인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사회주의를 제도화된 사회 질서로 재인식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 좋은 삶, 행복의 잠재력 같은 가능성을 품은 사회주의로 자본주의의 질병을 치유하자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위기 때마다 교묘하게 변신하며 결국 식인 자본주의가 됐다. 자본주의 이후의 시대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좌파 사회주의도 그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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