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돌과 어떤 것
- 나무는 많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뿌리, 줄기, 가지, 잎, 꽃, 열매. 그중에서도 요즘 단연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잎이다. 우리가 흔히 소리내어 말을 하듯 나무는 잎으로 소리 없는 말을 한다. 그 말을 알아들을 귀가 내게 없을 뿐이다. 뿌리가 없어 두리번거리는 우리는 사람의 말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중심이 분명한 나무에게 무슨 말이 그리 많이 필요하랴. 서걱이는 바람 소리와 단호한 침묵의 언어가 있을 뿐. (11)
- 아파트가 생기면서 골목이 없어졌다. 일직선으로 죽죽 뻗어 나가는 곳에서는 곡선의 골목을 품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효율의 시대에 그러한 곡선은 낭비인 것이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면 골목은 호기심의 아버지이다. 구부러지는 곳에서 호기심은 태어난다. 호기심이 없는 곳에서 아이들이 놀 이유는 없다. 골목이 없어지면서 골목의 아이들도 떠났다. (19)
- 입춘이다. 이십사절기에는 입하, 입추, 입동도 있지만 입춘은 어쩐지 그들과 격을 달리하는 것 같다.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것보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변화는 체감의 정도가 확연히 다르다. 입춘은 세상이라는 꽃이 제대로 확 벌어지는 변곡점이다. (23)
- 귀 기울이면 골짜기의 바위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돌은 자음, 물은 모음. 둘이 완벽하게 결합하여 빈틈없이 꽉 짜인 단음절의 문장을 부지런히 아래로 실어 나르는구나! (31)
- 해와 달이 아름다운 건 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저 알맞은 거리가 있어서 몸은 데이지 않고, 마음은 베이지 않는다. 꽃이 꽃으로 아름다운 건 땅에서 이만치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일락 말락 줄기나 가지 끝에 수줍게 달려 있는 봄꽃을 맞닥뜨리면 그런 실감이 든다. (33)
- 쓴맛이 좋아지고 나서부터 봄에 대해 매해 다르게 보려고 한다. 봄이라는 글자를 골똘히 보기도 한다. 무덤의 상석 같은 'ㅁ'에 사다리 같은 'ㅂ' 그 사이를 연약한 풀 한 포기가 연결해 주는 한 글자가 아닌가. (39)
- 내 그림자는 언제부터 있었나. 그건 내가 언제 이 세상에 왔을까와 똑같은 물음이다. 내가 이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올 때 그림자도 동시에 태어났다. 그림자는 울음보다도 먼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자란 태양이 너희들은 모두 내가 언젠가 녹여 먹을 사탕이야, 하고 지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찍어 놓은 불도장 같은 것! (86)
- 세상의 모든 상賞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개근상과 기타의 상. 전자가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받는 상이라면 나머지는 심사위원들이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다. 그러니 기타의 상들은 받는 게 아니라 실은 주는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120)
- 꽃에 입문하고 꽃에 흠뻑 빠지면서 동물과 식물의 관계를 살펴보는 내 생각도 조금 변했다. 나무를 두고서 움직일 줄도 모르는 저 어리석은 것을 좀 보라며 키득거렸던 게 그간의 상투적인 사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식물이 동물을 먹여 살린다는 생각, 굳이 우열을 다툰다면 과연 누가 더 고등하겠느냐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식물이 자생한다면 동물은 기생한다는 게 엄연한 사실이다. (127)
-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난다. 어디로 떠나는지를 잘 안다. 모두들 지금 밟고 있는 이 땅 아래로 홀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곳은 공기가 없는 곳이니 소리도 없는 곳이다. 살아 있는 존재들이 돌아다니는 것, 나무가 잎사귀를 살랑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 이것은 돌아갈 곳을 한번 미리 살펴보는 동작들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저벅저벅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내는 소리는 사실 이렇게 노크하며 묻고 있는 것이다. "나중, 들어가도 좋겠습니까?" (142)
- 겨울을 알몸으로 앓는 나무 앞에 서면 나무를 '木'으로 표기하는 연유가 저절로 짐작된다. 불가에서는 흔히 인간의 초라한 몸뚱아리를 '똥막대기'로 표현한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이 나무들 밑으로 들어가 'ㅡ'자처럼 누워야 한다. 바로 그곳이야말로 나의 근본이 자리하는 곳이다. 그러한 궁리와 함께 황벽나무 아래에서 손가락으로 '本'이라는 글자를 허공에 적어 보았다. (175)
- 새해 지나고 벌써 한 달. 아라비아 숫자만 큼지막하게 쓰인 달력 아래 살지만 그 속에 숨은 이십사절기를 올해부터 몸에 밀착시키기로 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 보아도 고작 오늘밖에 살지 못하는 내가 한 해의 중심을 그 어디로 삼는 건 부질없는 일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해살이의 시작은 입춘立春에 맞추는 게 좋을 듯하다. 봄이 저기에 저렇게 서는 것처럼 나도 여기에 이렇게 독립적으로 서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로 하자. (182)
나무와 돌과 어떤 것/이갑수/열화당 20220610 190쪽 18,000원
"동물의 모든 몸부림은 결국 뿌리 근처에 몸을 뉘어 식물로 되살아나려는 한 방편이다." 나무와 꽃과 돌 그리고 어떤 것을 관조하는 글입니다. 식물에 문외한이라 나오는 나무와 꽃 이름을 검색하며 찬찬히 읽었습니다. 조물주는 태초에 세상을 "물 반 나무 반"으로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식물은 자생하고, 동물은 기생합니다. 두 생물이 공생관계라면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요?
책에는 "궁리(궁리출판 포함)"라는 말이 스무 번 나옵니다. 궁리출판 대표인 저자가 정말 좋아하는 말인가 봅니다. 어떻게 궁리하든 인간은 나무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책에는 "궁리(궁리출판 포함)"라는 말이 스무 번 나옵니다. 궁리출판 대표인 저자가 정말 좋아하는 말인가 봅니다. 어떻게 궁리하든 인간은 나무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