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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구성할 권리 - 혈연과 결혼뿐인 사회에서 새로운 유대를 상상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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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가족문제가 공적인 영역과 분리되는 가족 안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불평등과 연결된 사회적인 의제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오늘날 활발한 가족변동 상황은 가족구성권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를 재구성하는 사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아직 많은 이에게 낯선 개념일 가족구성권은 말 그대로 '가족관계를 구성할 권리'를 뜻한다. 이 권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왜 중요할까? 우선, 가족구성권의 보다 상세한 정의를 보자. 가족구성권연구소는 가족구성권을 "다양한 가족의 차별 해소와 모든 사람이 원하는 가족 공동체를 구성하고, 차별 없는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로 정의한다. 이는 즉, 가족과 가족 사이에 차별이 존재하며, 가족을 구성할 권리 또한 평등하게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다. (7) 가족을 정치화하는 가족구성권은 단순히 가족으로 인정되지 않는 관계들을 가족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데서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앞서 가족구성권의 정의에서 살펴보았듯 가족구성권은 근본적으로 가족을 둘러싼 여러 갈래의 복합적인 차별 해소에 대한 접근을 요청한다. 다시 말해, 사회가 상상해오고 권장해온 ‘가족’의 의미와 가족모델은 무엇인지, 그것이 한국사회에서 '시민'으로 가정되고 상상되는 이들의 모습과 어떻게 연동되어 있는지, 제도가 어떻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지 등 여러 갈래의 질문들이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시민'으로서의 삶과 자격이 부여되는 데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중심 시민모델이 핵심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8)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중심 시민모델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퀴어, 장애인, 비혼여성, 싱글맘, 빈민 등 '이상적이지 않은 시민'들은 곧 '이상적인 가족'을 갖지 못한 이들로도 간주되며, 이들은 말 그대로 '뒤처진 존재'이자 보이지 않게 가려져야 하는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 - 마야문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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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까딴의 어원은 다양하지만 인디오들이 원래 어떻게 불렀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마야는 남부, 중부, 북부 지방으로 나눌 수 있는데 유까딴반도는 북부 지방에 해당한다. 유까딴은 멕시코의 동남쪽에 있는 반도로 총면적이 180,000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한반도 면적의 2/3 정도 되는 커다란 반도이다. 유까딴은 산이 없는 열대 평원 지역으로 거의 모든 곳에서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다. 이곳 사람들은 장수하는데, 140세에 이르는 노인도 있었다. 현재 사용하는 '마야'라는 용어는 최대한 넓게 보았을 때 유까딴반도의 상당한 지역을 일컫는 말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 정복 시기 이전에는 하나의 대명사로 쓰인 적은 없다. 유까딴에는 무척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이 있었지만, 금들이 가득하다는 사실무근의 소문이 퍼졌다. 이로 인하여 탐욕에 눈이 먼 에스빠냐 사람들이 유까딴으로 향하게 되었고 정복의 역사가 시작됐다. 마야 사람들의 주식은 옥수수였다. 옥수수로 다양한 음식과 음료를 만들었다. 외상 거래가 이루어졌고, 폭리를 취하지 않는 등 상거래 예의가 잘 지켜졌다. 수확한 농작물을 보관하는 훌륭한 곡물창고도 있었다. 유까딴 사람들은 매우 관대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무척 환대해서 낮에는 음료를 대접하고 밤에는 음식을 대접했다. 마야인들은 0의 개념을 알았고 20진법을 사용했다. 마야 사람들은 천체 관측에 있어서 당대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과학적인 결과를 내고 있었다. 밤에 시간을 알기 위하여 금성과 염소자리, 쌍둥이자리를 활용했고, 발달된 천문학 지식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과학적인 달력 체계를 만들었다. 마야는 지금의 멕시코, 과테말라, 벨리세,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지역에 빼곡히 도시를 세우며 번성했다. 디에고 데 란다는 16세기 에스빠냐의 신부로 초기 식민지 시대에 멕시코로 건너가 마야 원주민들 인연을 맺었다. 란다는 원주민들과 지내며 교류했지만, 그들의 인신공양과 우상숭배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 원주민을 이교도로

라마와의 랑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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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0년 무렵, 행성연합은 수성, 지구, 달, 화성, 가니메데, 타이탄, 트리톤으로 구성됐지만 행성보다 위성이 더 많아 시끄럽습니다. 일곱 멤버가 각각 거느리고 있는 위성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성연합의 본부와 회의장은 지구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달에 있습니다. 우주 파수대는 거대한 운석이 지구의 방호망을 뚫을 수 없도록 새로운 소행성들을 찾아내고 있었습니다. 문제의 소행성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형식적으로 31/439로 이름 지어졌습니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큰 소행성으로 밝혀지자 힌두의 신전에서 빌려와 이름을 짓게 됐습니다. 31/429는 '라마'가 되었습니다. 탐사위성이 1만 킬로미터 밖에서 찍은 영상에는 회전하는 원통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50킬로미터 높이의 원기둥으로 지름이 20킬로미터에 이르는 보일러 통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인데버호는 수명이 다 된 행성 추적 신호기를 확인하여 회수하거나 다시 설치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라마와 랑데부를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인데버호가 겨우 따라잡았을 때 라마는 이미 금성의 궤도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인데버호 선장인 노턴과 선원들은 40일 뒤면 근일점에 다다라서 태양을 스쳐 지나게 될 라마의 표면에 착륙하여 탐사를 시작합니다. 소설은 해답을 구하는 것보다 질문을 던지는 소설입니다. 라마에 처음 들어가려고 문을 열 때부터 시작합니다. 노턴 선장은 무의식적으로 지구와 같은 방향으로 장치를 돌리지만 꿈쩍도 하지 않자 반대방향으로 돌려서 엽니다. 행성연합이나 라마 위원회는 의견이 둘로 나뉩니다. 라마는 '3의 여분을 갖는 미학'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3중의 3중 형태를 가진 구조물도 있습니다. 라마의 추진 동력은 뉴턴의 제3법칙을 무시하고 태양의 가장자리를 스치며 아련히 빛나는 우주의 한구석으로 날아갔습니다. 탐사한다며 내부를 휘젓고 다닌 노턴과 선원들은 물론 수소폭탄을 쏜 지구인들에게 해코지는커녕 일언반구도 없이

강뉴 - 에티오피아 전사들의 한국전쟁 참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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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유엔은 유엔군 참전을 결정했습니다. 에티오피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의 파병 요청을 받자 1950년 8월에 황실 근위대를 중심으로 보병 1개 대대로 파병부대를 창설했습니다. 훈련받은 파병부대 장병들이 1951년 4월 12일 황제로부터 '강뉴부대'라는 명칭과 부대기를 하사받았습니다. '강뉴(Kagnew)'는 에티오피아어로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이며 또 하나는 '초전 박살'입니다. 4월 13일 강뉴부대는 지부티로 이동해 미군 수송선을 타고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1951년 5월 7일, 강뉴부대는 1만 4500킬로미터를 달려와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현지 적응훈련을 한 후 미군 제4군단 제7사단 32연대 4대대에 배속되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전사들에게 닥친 시련은 한국의 혹독한 추위였습니다.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추위와 찬바람은 적군보다 더 위협적이었습니다. 강뉴부대 제2진은 21일 동안의 항해 끝에 1952년 3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해 제1진 강뉴부대와 교대를 했습니다. 그 후 에티오피아는 1953년 4월 5일부터 1954년 7월 10일까지 제3진, 1954년 7월 10일부터 1955년 7월 9일까지 제4진을 파병했습니다. 강뉴부대 제4진은 전쟁고아가 많은 고아원을 특별히 돌봤습니다. 6.25전쟁 당시 유엔이 요구하는 1개 대대 병력(약 1200명) 이상을 파견한 나라는 16개국입니다.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베르그, 네덜란드, 터키, 콜롬비아, 남아공화국 그리고 에티오피아입니다. 에티오피아는 황실근위대 6,037명을 한국전쟁에 파병했습니다. 강뉴부대(Kagnew Battalions)는 253번의 전투에서 253번 승리했고, 124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으나 포로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강뉴부대는 전우의 시신도 모두 수습해 돌아가 부산 유엔군 묘역에는 에티오피아군 병사의 무덤이

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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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정치는 광범위하게 탈이데올로기화했다'라는 생각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다. 중도 쪽으로 떠밀려 간 정당은 더 이상 아무런 사상도 없고, 거대한 목표도 추구하지 않는 듯하다. 정당이 선거 유세 때 내세우는 구호는 세련됐지만 가벼워보인다. (...) 탈이데올로기화의 핵심은 예전에는 좌파가 어렵고 복잡한 이론을 다룬 논문에 엄청난 흥미를 가졌으며 벽돌 두께만한 책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지만, 이런 위대한 논쟁의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 이렇게 '느낌의 좌파'는 자신이 무엇에 반대하는지만 잘 알고, 무엇을 찬성하는지는 좀처럼 표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된 까닭은 탈이데올로기화 때문이라는 판단이 지배적이다. 지난날 좌파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했지만, 오늘날 좌파에게 이 모든 확신은 산산조각 났다. (8) 좀 더 좌경이면서 정치적으로 확실한 좌파, 중도에 있는 보통 사람들, 왼쪽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주 넓은 의미에서의 좌파'에 속한다. 좌파는 이렇게 다채롭고 이질적이다. (16) 오늘날 일부 경제학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학파가 마르크스를 인류 정신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인정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마르크스가 끼친 공로가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다르게 봅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역학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독을 막을 수 있는 면역 체계와도 같습니다. 다음 같은 사례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부는 사적으로 생산된 뒤 거의 불법이나 다름없는 국가가 부과하는 세금에 의해 강탈당한다'라는 주장에 너무 쉽게 빠져듭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를 공부한다면 사실은 정반대라는 점, 즉 '부는 공동으로 생산된 뒤 생산관계와 소유권을 근거로 사적으로 취득된다'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더 이상 그런 생각에 빠

알렉스 캘리니코스 시사논평 - 양극화, 극우,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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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당선은 엄청난 희망을 불러일으킨 특별한 사건이었다. 임기 시작부터 오바마는 그 희망을 저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경 우파 경향인 티파티 운동이 오바마에 맞서 들고일어났다. 지금 티파티와 유사한 언행을 하는 후보[트럼프]가 오바마의 후임자로 취임하려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난 데는 오바마의 책임도 명백히 있다. (33) 2016년에 벌어진 두 충격적 사건(브렉시트 국민투표와 트럼프 당선)과 마찬가지로 2020년 미국 대선은 1980년대에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구축한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헤게모니에 균열이 가고 있음을 또다시 보여 준다. 그 헤게모니는 2007~2009년 전 세계 금융 위기와 그 후폭풍 동안 불만을 억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당시 평범한 사람들이 일자리와 집을 잃고, 소득이 줄고, 공공서비스가 삭감되면서 거대한 분노가 쌓였다.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의 브렉시트 추진과 마찬가지로 트럼프와 공화당의 성공은 정치체제를 대자본의 이해관계에서 어긋나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실패한 국가"가 될지 모른다고 말하는 크루그먼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다. 물론 그 두려움은 과장일 수 있다.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든 미국 제국주의는 중국의 부상을 억누르려 할 것이고, 군사·금융에서 미국이 가진 힘을 전 세계에 뽐낼 것이다. (59) '죽음에 맞선 삶'이란 이윤에 맞선 삶인 것이다. 살아생전 자본주의가 죽음을 거래하는 체제임을 이토록 생생하게 목격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언제나 그랬다. 초기 자본주의는 노예무역과 아동노동에 의존하지 않았던가. 이제 이 체제는 이 세상에 남은 야생 생태계를 침범해서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이 창궐할 조건을 만들고 그 대가를 노동계급이, 많은 경우 목숨으로 치르게 하고 있다. 이에 맞선 투쟁은 생사를 건 투쟁이자 우리의 삶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다. (193) 자본주의는 아무도 통제하지 못하는 체제다. 자본가들은 생존하려면

어디에도 없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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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남자가 사진을 내밀며 알아보겠냐고 물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새미 웬트입니다. 이건 새미의 두 번째 생일날 찍은 사진이에요. 3일 뒤 아이는 사라졌습니다." 뒤이어 말했다. "이 아이는 1990년 4월 3일에 사라졌습니다. 저는 당신이 새미 웬트를 납치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새미 웬트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호주 멜버른에서 시간 강사로 일하는 킴벌리 리미에게 제임스 핀이라는 생판 만난 적도 없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킴벌리가 28년 전에 납치돼 사라졌던 세미 웬트라고 했다. 그날 밤 킴벌리는 온몸이 그림자인 키 큰 남자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남자는 소멸 이론에 대해 말하며 서류 뭉치를 보여줬다. 소멸 이론이란 기억이 형성될 때 뇌에 남겨진 흔적은 필요할 때 다시 꺼내볼 수 있다고 한다. 어떤 기억을 오래 꺼내보지 않으면 그 기억은 뇌 속을 떠다닌다고 한다. 제임스는 결정적 증거라며 DNA 검사 결과를 내밀었다. 킴벌리와 제임스가 형제일 가능성이 98.4퍼센트였다. 그의 진짜 이름은 스튜어트 웬트라고 밝혔다. 킴벌리는 이건 나에게 일어난 일이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빠에게 말하자 불쾌한 깨달음이 밀려왔다. 아빠는 알고 있었다. 결국 킴벌리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른다. 조수석 시트에 엉덩이 자국이 또렷하게 남을 만큼 오랜 시간을 돌아다니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게 된다. 온전한 킴벌리 리미도, 온전한 세미 웬트도 아닌, 중간 어디쯤의 이도 저도 아닌 사람처럼 될 때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소설은 무명의 작가를 단박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며 스릴러 독자에게 '숨막히게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종교, 가족, 사랑, 성소수자, 유괴, 기억 등등이 과거와 현실을 넘나들며 조금씩 사실을 향해 간다. 실타래를 다 풀 때쯤에 마주친 진실은 너무나 뜻밖이다.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도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

어쩌다 유교걸 - 어느 페미니스트의 동양 고전 덕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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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맹자 왈을 공부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보수적인 여자가 아니라 유교를 공부하는 여자, 노브라로 앞가슴이 훤히 트인 티셔츠를 입고 《논어》를 들고 다니는 여자, 또래 친구들이 스토킹 범죄로 스러져가는 걸 보고 분노하면서 음양을 공부하는 여자, 고리타분한 건 딱 질색이라면서 고전 텍스트를 읽는 여자,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예(禮)에 대해 말하는 여자(8)'입니다. 스스로 '유교걸'이라고 합니다. '유교 같은 것에 진절머리 내던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스트인 유교걸이 되기까지 20대 중 절반의 시간이 필요(22)'했습니다. 저자는 대학을 그만두고 인문학 공동체 문탁네트워크에서 유교를 공부합니다. 《열녀전》이 열녀문 얘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열전(列傳)'과 같이 어떤 이야기가 줄지어 있다는 뜻의 '열(列)' 자를 쓰는 《열녀전》은 '옛 여성 이야기 모음집'이라는 걸 지금 알았습니다. 저자는 '《열녀전》을 읽으며 나의 페미니스트 자아와 유교 자아가 경계를 풀고 화해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43)'이 들었다고 합니다. 공부할수록 夫婦有別 長幼有序(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하고,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한다.)처럼 불편했던 문장들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여성혐오와 차별이 아니라 '유교의 '구별'과 '차례'는 서로가 서로의 가능성을 믿고 의지하면서, 각자 다른 역할을 수행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67)'하며 유교야말로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학파라는 믿음이 강해졌습니다. 어려서부터 계절을 즐길 줄 아는 인간이었다면 나는 아마 비구니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청소년 시절 내내 나는 대통령이나 변호사를 꿈꾸는 진취적인 여자였다. 사주상 나의 캐릭터는 갑목(甲木)이라던데, 이것이 나의 타고난 성정을 잘 표현해준다고 생각한다. 갑목은 큰 느티나무와 같아서 성장하는 힘이 강하고 위로 뻗어나

파타고니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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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본 쉬나드는 스피어 피싱, 매사냥, 플라이 피싱, 급류 카약, 텔레마크 스키나 백컨트리 스키, 빙벽 등산, 요세미티 거벽 등반, 서핑 같은 다양한 아웃도어 스포츠를 경험했습니다. 특히 암벽 등반은 뛰어난 업적을 남긴 전설적인 등반가입니다. 한국에서 군복무를 한 이본 쉬나드는 인수봉에 바윗길 2개를 개척하기도 했습니다. 이본 쉬나드는 자신이 만든 피톤이 등반하는 바위에 손상을 가한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한 뒤로는 제거가 가능한 등반 보호 장비를 제작해 판매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어야 완벽한 디자인이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어야 완벽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함이 완벽함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이본 쉬나드는 선(禪) 철학을 공부하고 명상하면서 단순함을 배웠습니다. 스포츠에서 터득한 선을 비즈니스에도 적용했습니다. 대부분의 기업은 이윤을 극대화해 주주에게 돌려주는 것을 목표로 운영합니다. 파타고니아에서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뒤 파타고니아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파타고니아가 하는 일이 원활하게 진행된다면 이윤은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파타고니아는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기술을 활용하지 않습니다. 오염을 유발하는 과거의 비효율적인 제품과 생산 방법을 더 깨끗하고 더 단순하며 더 적절한 기술로 대체하기 위해 기술을 활용합니다. 파타고니아는 재생 불가능한 자원 사용에 대한 세금을 스스로 부과했습니다. 매출의 1퍼센트를 자연환경을 보호하고 복원하는 일에 사용합니다. 한 단계 더 진전시켜 2002년에는 ' 지구를 위한 1퍼센트 One Percent for the Planet '라는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매출의 1퍼센트를 기부해 자연환경을 보호하고 복원하는 환경단체를 지원합니다. 파타고니아는 고향별 지구를 파괴하지 않는 리스판서블 경제 를 지향합니다. 지구에 해를 입히지 않으며 다음 200년 동안 운영을 지속해나가는 비결을 찾고 있습니다. 이본 쉬나드가 19

고양이들 - 루이스 웨인의 웃기고 슬프고 이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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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만 해도 영국에서 고양이는 호감을 주는 반려동물이 아니었습니다. 루이스 웨인 Louis Wain 이 그린 고양이 그림이 인기를 얻기 전까지는요. 루이스 웨인은 1860년 8월 5일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뒤로 줄줄이 다섯 명의 여동생이 태어났습니다. 1877년부터 1880년까지 웨스턴 런던 예술학교에서 공부했고, 졸업 후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1880년 부친이 돌아가시자 루이스 웨인은 가장 노릇을 하게 됐습니다. 1881년 12월 10일 처음으로 루이스 웨인의 그림이 잡지에 수록됐습니다. 이듬해인 1982년 교사를 그만두고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의 스태프가 되어 전시회를 취재하며 기사를 쓰고 삽화를 그렸습니다. 1883년 누이동생들의 가정교사로 에밀리 리처드슨(Emily Marie Richardson, 1850~1887)이 왔습니다. 둘은 사랑에 빠지고, 1884년 1월 30일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루이스 웨인는 스물세 살, 에밀리는 열 살이 더 많았습니다. 독립해 신혼집을 차렸지만 행복은 길지 않았습니다. 에밀리가 유방암 진단을 받고 침대에 갇히다시피 하며 투병 생활을 했습니다. 루이스는 에밀리를 기쁘게 하려고 침대 곁에서 피터라는 새끼고양이를 스케치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평범한 삽화가였던 웨인은 피터를 대상으로 수많은 습작을 그렸습니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의 사주인 윌리엄 잉그램 경(Sir. William Ingram)에게 고양이 그림 몇 점을 보여주자 그는 두어 점을 잡지에 실었습니다. 1886년 12월에 윌리엄 잉그램 경에게서 크리스마스 특집호에 실을 삽화 의뢰를 받았습니다. 11일이 걸려 완성한 〈 새끼고양이들의 크리스마스 파티 A Kitten's Christmas Party 〉는 약 이백여 마리의 고양이가 등장했고, 곧바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고양이 화가라는 명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사반세기 동안 일감이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에밀리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불평등한 선진국 - 대한민국의 불평등을 통계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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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끝난 폐허에서 출발한 대한민국은 1960년 초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일본은 물론 북한에도 뒤지고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보다도 가난했지요. 하지만 지난 60년간의 성장은 누가 봐도 눈부셨습니다.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고 이야기하지요. GDP는 421배 커졌고, 수출액과 정부 예산 규모는 1만 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GDP 규모는 이제 전 세계 10위 안에 들어가고, 1인당 소득(GNI)도 서유럽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입니다. 과학기술 투자액은 미국, 중국, 독일, 일본 다음인 세계 5위입니다. (14) 2019년 수출액은 1960년 대비 1만 6,950배에 달합니다. 무서운 증가세입니다. 그 결과, 한국의 수출액 순위는 중국, 미국, 독일, 일본, 네덜란드 다음인 6위입니다. 물론 수출이 느는 만큼 수입도 늘었지요. 2019년 기준 한국은 세계 9위의 수입국입니다. 수출과 수입을 합하면 전체 무역 규모는 1조 달러를 넘습니다. (17) 우리나라 2019년 연구개발 투자는 정부와 민간을 합쳐서 총 89조 471억 원(764억 달러)입니다. 이는 OECD 국가 중 세계 5위이며, 국내 총생산 GDP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은 4.64%로 세계 2위입니다. GDP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은 2016년 이래 계속 세계 2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20) 2019년 기준 대한민국 국민의 1인당 GNI는 3,521만 원입니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43,430달러로 전 세계 27위입니다. 일본, 이탈리아와 비슷하며 2017년 기준으로 OECD 평균의 95% 수준으로 2009년 89.1%에 비해 격차가 많이 줄었습니다. (...) 2021년 기준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 수준은 일본, 이탈리아, 뉴질랜드, 스페인과 비슷합니다. (23) 국민소득이 높아진 것은 나쁘지 않은 변화입니다. 하지만 선진국이라는 표현이 낙원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선진국이 되기 이전

이상한 성공 - 한국은 왜 불평등한 복지국가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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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2021년 7월 2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만장일치로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했습니다. 1964년 UNCTAD가 설립된 이래 가장 가난한 개발도상국이 부유한 선진국으로 지위가 변경된 사례는 한국이 처음이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기적이 일어난 것이죠. (7) 세대 담론은 부와 특권이 세습되는 계급사회의 현실을 감추는 위험한 장막이 될 수 있어요. 지금 청년들이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세대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부가 대를 이어 세습되는 불평등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불평등의 사슬을 끊는 것은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대다수 기성세대를 적으로 돌리는 세대 간의 반목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소수의 기득권층을 제외한 특권 없는 사람들의 세대를 가로지르는 연대입니다. 문제의 본질은 세대가 아니라 부가 세습되는 새로운 신분사회니까요. (45) 전 세계에서 유명한 CEO 1,582명의 출생 순서를 조사한 연구 결과에서도 무려 43퍼센트가 첫째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출생 순서에 따라 부모가 투여하는 자원의 양이 다르기 때문에 자녀의 역량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자란 형제들도 그럴 진데, 사회적 지위가 상이한 아이들의 성공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상식적인 결론 아닐까요. (52) 우리가 참 대단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사회문제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니까요. 실제로 한국은 구매력 기준으로 1인당 GDP가 4만 불이 넘는 부유한 국가입니다. 동시에 한국은 65세 이상 노인 중 절반 가까이가 빈곤한 국가입니다. 부자 나라 대한민국에서 65세 이상 노인 중 폐지를 주워 생활하는 노인이 무려 6만 6천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중 29퍼센트는 이미 80세가 넘은 초고령 노인입니다. 하루 종일 폐지를 주워도 노인들의 월 평균 수입은 20만 원이 되지 않습니다. (67) 한국에서 대기업의 성장은 국민의 엄청

지금은 없는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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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자는 정책에 청년들이 '공정하지 않다'고 강력 반대하는 목소리나, 휠체어를 타야 하는 장애인 대학생의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턱이 없는 강의실로 바꾸기로 했다는 결정에 '역차별이다'라고 분노하는 목소리들에 이르면 아예 이런 질문을 전지고 싶어진다. 도대체 이들이 생각하는 '공정함'이란 어떤 의미인가? (25) 가짜뉴스는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결과라고 진단할 수 있다. 이해집단 간의 치열한 갈등이 정치라는 과정 속에서 원활하게 해소되지 못하니 집단들은 정치적 해결이 아닌 파워게임으로 이해를 관철시키려 시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파워게임의 룰은 간단하다. 갈등하는 상대방과의 대화와 타협은 고려되지 않고, 상대방을 위선적인 대상으로 매도하거나 여론으로부터 고립시켜 영향력을 잃도록 만들면 된다. 그런 점에서 가짜뉴스가 주로 사회적 약자를 공격하거나 갈등 관계인 상대방이 여론의 비난에 부딪히도록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53) 만 18세가 선거권을 갖게 되었으니 그에 맞춰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사후대책이 아니라, 의무교육 과정에 민주시민교육을 확대 편성함으로써 선거권을 더 하향시키겠다는 포부가 필요하다. (68) 선거를 민주주의의 유일한 수단으로 여기지 말자는 것이다. (...) 선거 다음 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민주주의 공화국의 시민이다. 유권자로서 우리는 단 한 표를 행사할 뿐이지만 시민으로서 우리는 더 많은 권리를 지닌다. 정치와 선거는 동의어가 아니다. (71) 언론은 자기 진영의 독자들에게 호소할 수 있으니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기사를 뿌리고, 독자들은 기꺼이 그 기사들을 팔아준다. 오보는 그렇게 반복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벗어나기 위해 독자로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 언론 탓만 하고 있기엔 오보가 가지는 영향력이 너무 크다. (123) 전국금속노동조합에 속한 청년 노동자 261명이 지난 6월 30일에 "정규직화가

장애시민 불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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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던 내가, 극복을 성공의 요건으로 여기던 내가, 성공을 이기심의 결과로 여기던 내가, 이기심을 생존의 요소로 여기던 내가, 생존을 경쟁의 합리적 근거로 여기던 내가, 장애운동을 계기로 오랫동안 나를 지배하던 신념을 회의적으로 돌이켜보게 되었고, 타인의 고통에 연대하는 삶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이토록 다른 차원으로 이끈 순간의 말들을 잊고 싶지 않아 이 책을 쓰게 되었다. 나를 '아차' 하게끔 한 연결과 연대의 풍경을 꼼꼼히 새겨두었다. (6)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불화'가 정치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민주주의 사회의 규칙이라 여겨지는 '분배를 목표로 한 합의'는 정치(politics)가 아니라 치안(police)을 위한 활동이라는 것이 그의 주된 주장이다. 민주주의 정치는 그저 자원을 나눠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간 존재를 부정당했던 '몫 없는 자들'이 몫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한다. 목소리 없는 이들, 몫 없는 이들이 몫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화는 민주주의의 위협 요소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번영을 견인하는 힘이다. (14) "편의시설을 바꾸는 데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그가 대답했다. “장애인에게 계단은 계단이 아닙니다." 계단은 위층과 아래층을 연결하는 통로가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나누는 차별의 단면이었다. 그는 돈키호테 같은 대답을 이어갔다. 돈키호테가 풍치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했듯, 그는 계단을 보면 계단으로 향했고, 계단이라는 괴물을 무찌르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기를 꿈꿨다. 공공장소에 설치된 계단과 문턱에 대드는 활동에 그토록 진심을 다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 계단은요,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선 같은 거예요, 그건." (27) 그는 장애운동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소개했다. "여기에 모인 장애인은

오늘 시작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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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재난은 플래시 포워드다. 우리에게 미래 세계를 잠깐 보여준 것이다. '잠깐'이라는 표현은 코로나 백신이 머지않아 개발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어쨌건 코로나19 재난은 '미래에 재난이 어떻게 일어나고, 재난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강요 받고, 어떤 선택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지'를 보여준다. (9) 너른 정원에 독초가 한 포기 자리 잡았다. 독초는 매일 두 배로 늘어난다. 정원의 주인은 게으름을 부리면서 정원의 절반이 독초로 채워지면 독초를 뽑기로 결정하였다. 이 주인에게 독초를 뽑을 수 있는 날은 며칠이나 남아 있을까? 단 하루다. 우리는 지구 멸망까지 단 하루가 남았을 때, 재난을 막는 행동을 하기로 겨우 합의하게 될지 모른다. (18) 불평등이 줄어들면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경제활동 수준 자체가 낮아진다. 예를 들어 불평등한 경제에서는 1인당 소득이 3만 달러여도 가난한 사람이 굶을 수 있지만, 평등한 경제에서는 1인당 소득이 1만 달러만 되어도 굶지 않을 수 있다. (33) 탄소세 도입에 따른 정치적 저항은 탄소세 수입을 탄소 기본소득으로 나누어주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다. 탄소세와 결합된 탄소 기본소득은 전 국민의 2/3를, 내는 돈보다 받는 돈이 더 많은 순 수혜자로 만든다. 지구를 살리면서, 돈까지 받는 정책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42) 토지 보유세와 토지 기본소득은 불로소득을 걷어내고,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며, 불평등을 줄여 한국 경제에 오랜 부담이었던 큰 숙제를 풀어줄 수 있다. (...) 부동산 불로소득은 혁신의 동기를 잠식한다. 초등학생의 장래 희망이 건물주인 나라에서 혁신을 기대하기 힘들다. 정부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혁신 정책은, 혁신 없이 앉아서 돈을 벌 수 있는 부동산 불로소득 같은 것들을 없애는 것이다. (55) 코로나19 재난은 미리 준비하는 것과 늦게 준비하는 것의 차이가 결정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기후재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와 혁명의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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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는 1891년 1월 22일 이탈리아의 큰 섬 사르디니아의 알레스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에 속해 있긴 해도 사르디니아는 긴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에서 장화의 발꿈치만치 서쪽으로 떨어져있는, 변방 중에서도 변방의 섬이다. (5) 그람시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발전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발발한다고 말하였으나 후진 농업국가인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이루어졌으니 러시아 혁명은 마르크스의 『자본』의 주장에 거스르는 혁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이론이 틀린 것인가? 아니면 러시아 혁명이 제대로 된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가? 그람시는 이 두 의문을 모두 잠재우며 이를 오히려 마르크스 사상의 정수를 드러내 보인 역사적인 현실로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4) 토리노의 『전진』 본부에 있다가 그람시의 사무실로 옮겨온 사람들은 1919년 5월 1일 타스카, 톨리아티, 테라치니 등과 '사회주의 문화비평' 주간지로 『신질서 L'Ordine Nuovo 』를 창간했다. 이 저널은 두 가지 이유로 이탈리아 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하나는 『신질서』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조만간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적인 핵심인사들이 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 신문이 이탈리아의 소비에트, 즉 공장평의회를 조직하기 위한 매체가 되어 이탈리아 노동운동에 이정표를 세웠기 때문이다. (18) 그람시에게 흔히 따라붙는 호칭 중 하나가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건자'이다. 물론 이 호칭이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가 공산당 창당을 처음부터 주창하거나 고집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람시는 사회당을 해체하고 공산당을 새롭게 창당하는 것에 내켜하지 않았으며, 위에서 아래로 건설하는 방식에도 회의적이었다. 게다가 보르디가가 주도하는 공산당 계획은 당과 대중의 관계나 공장 노동자조직 같은 신질서 그룹의 의제들과 전혀 부합하지 않고, 오로지 규율과 중앙집중만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람시는 당

우주에 투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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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패권을 잡기 위해 다퉜고, 이 체제 경쟁에서 나온 우주 산업 발전의 시대를 올드 스페이스라고 한다. 이 시기 우주는 새로운 과학 기술을 먼저 선보이고 과시하기 위한 장소였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21) 지구에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이 한창이듯, 우주에서도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현재 달의 앞면에는 미국 성조기가, 달의 뒷면엔 중국의 오성홍기가 나부끼고 있다. 하지만 이미 기술력은 중국이 한 수 위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26) 페제 경쟁의 산물이었던 올드 스페이스는 민간 기업이 참여해 수익성으로 연결되는 뉴 스페이스로 변하고 있다. 더 이상 무의미하게 막대한 비용을 우주에 지불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돈을 벌어야 한다. 민간 기업은 체제 경쟁에는 큰 관심이 없다.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는 만큼 수익성 있는 사업을 통한 부의 창출이 목표다. 우주 경쟁은 이제 우주에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의 문제로 바뀌고 있다. (30) 일론 머스크와 제프 베조스, 두 거물은 민간 기업이 참여하는 뉴 스페이스 시대를 이끄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둘은 지구에서 벌이는 사업으로는 딱히 부딪힐 일이 없다. 각각 전기차와 온라인 쇼핑으로 주력 사업 분야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주에서는 치열한 선의의 경쟁자다. (37) 비슷한 시기에 회사를 설립했지만 일론 머스크는 정신없이 달려온 토끼, 제프 베조스는 신중하게 한 발 한 발 움직이는 거북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블루오리진의 모토는 '한 걸음씩 담대하게'였고, 거북이는 블루오리진의 마스코트였다. (38) 이렇게 라이벌의 존재는 서로의 발전을 위해 긍정적이다. 우주를 사랑한 두 명의 천재, 일론 머스크와 제프 베조스의 경쟁이 없었다면 민간 기업이 우주 산업에 참여하는 뉴 스페이스 시대가 없었을 수도 있다. 둘의 경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한 명은 계획을 세우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고, 다른 한 명은 조용히 일을 진행하는

20세기와 21세기 초의 이데올로기 장기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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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와 21세기 초의 이데올로기 장기파동 우리는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자유주의 시대부터 시작할 수 있는데, 이 시대에 다양한 유럽 나라들에서는 자유방임시장 개인주의라는 사상에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진영이 지배했고, 보수주의 우파는 대부분 수세적인 입장이었다. 이 시대의 주인 기표는 자유였다. 자유주의 시대는 세계대전과 세계공황이라는 재앙으로 끝을 맺었고, 그 자리는 정의라는 주인 기표를 가진 자유주의의 오랜 적수인 사회주의가 곧 서구에서는 민주적 사회주의가, 동구에서는 권위주의적 사회주의가 차지했다. 자본주의의 위기에 직면해, 붉은 러시아는 국가 중심적이고 매우 억압적인 일국 사회주의의 종주국이 됐다. 동시에, 루스벨트는 자신의 진보적 뉴딜을 고안 중이었는데, 이 같은 뉴딜은 (프랑스에서 더 짧은 기간 동안 레옹 블럼의 인민전선 내각이 그랬듯이) 친노동정책과 사회민주주의적 공공지출에 우선순위를 뒀다. 자유주의가 위기에 빠지면서, 사회주의의 발흥에 대한 우익의 반작용으로 파시스트 민족주의가 출현했는데, 이들은 노동계급운동 담론의 일부를 전유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사회주의가 철의 장막 양쪽에서 발전했다. 서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나타난 계급타협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사회민주주의적 협약형태를 띠었고, 이른바 영광의 30년, 곧 1945년과 1975년 사이 자본주의가 경험한 경제성장의 황금시대로 이어졌다. 소련과 그 위성국에서 이 같은 흐름은 공산주의 계획경제와 사회복지정책으로 표출됐다. 1970년대 오일쇼크를 비롯한 잇따른 위기들은 사회민주주의 시대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이 같은 국면에서 새로운 이데올로기 질서가 탄생할 수 있는 공간이 다시 한 번 열렸다. 이후 헤게모니 싸움에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칼 포퍼, 밀턴 프리드먼 같은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은 신자유주의가 승리했다. 이런 사상가들은 사회주의 세계를 겨냥해 낭비적이고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브랜드의 보수정치인을 통해 신속하게 이행됐다.

플라스틱 바다 - 지구의 바다를 점령한 인간의 창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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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여름.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로 항해하던 찰스 무어는 그림 같은 바다에 이상한 덩어리와 부스러기들이 흩어져 있는 걸 봤다. '낮이고 밤이고 하루에 몇 번을 내다봐도 플라스틱 조각이 물 위로 떴다 잠겼다(13)'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의 중간 지점이었다. 머지않아 '태평양 거대 쓰레기 지대(the Great Pacific Garbage Patch)라고 불리게' 되지만 대형 잔해 위에 플라스틱 부스러기로 가볍게 양념을 친 '묽은 플라스틱 수프(14)'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상황이었다. 1997년의 항해 때 본 것은 '전체 그림으로 치면 겨우 조그만 점 하나에 불과한 것 같았다(74)'. 찰스 무어는 공식 탐사팀을 꾸리고 1999년 8월 15일에 태평양 환류(還流 Gyre)가 무풍지대에 만든 쓰레기 섬으로 떠났다. '지독한 쓰레기들을 많이 수집했다. 그물과 로프 더미는 물론이고 화학 물질이 들었던 드럼통, 물러진 표백제 병, 일본식 그물 부자(浮子) 여러 개, 신발창을 오려내고 남은 발표 고무 시트, 조리용 사워크림 통도 있었다(109)'. '플라스틱은 마치 육상선수 같다. 종종걸음을 치다가, 하늘을 날고, 헤엄도 친다. 여권 없이도 국경을 건너 어디든 간다. 말 그대로 불법 체류자다(88)'. 무어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쓰레기 문제가 너무나 속상했던 것 외에는 어떤 특별한 동기도 없었(236)'지만, 환류 탐사에 관한 논문을 쓰며 단편 영화도 찍었다. '2001년 12월. 1999년 환류 탐사로부터 1년 반이 지났고, 운명의 첫 번째 환류항해로부터 3년 반이 지났다. 『해양 오염 회보』의 제42권 12월 호가 도착했다. 이렇게 씌어 있었다. "북태평양 중앙 환류에서 플라스틱과 플랑크톤 비교". 이 간결한 다섯 쪽짜리 연구가 그간의 노력을 증명하고 있었다(238)'. 바다에 플라스틱이 있는

일기 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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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엔 "국경이 없"지만 "우편번호가 건강 상태를 결정"한다. 우리는 그 말을 얼른 알아듣는다. (15) 9월에 책을 낸 이후 인터뷰 때문에 사람을 서너번 만났는데, 지난 일년간 뭘하며 지냈느냐는 질문을 매번 받았다. 2020년에 저는 창밖을 보며 지냈습니다. (26) 2020년의 눈사람은 마스크를 쓰고 있다. (29) 봄비 내릴 때 책상 앞에 앉았는데 소설 한편을 마무리하고 나오니 낙엽이 떨어지는 때,라는 패턴으로 시간이 흐르는 일을 직업으로 택해 살다보니 나이를 띄엄띄엄 생각하거나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32) 하지만 지금 사람들의 명은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는 구조 構造 되는 것이다. (34) 사람들이 전염을 두려워하는 마음에는 내가 병에 걸리는 경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겠지만 내가 매개가 되어 남을 병에 걸리게 할 수 있다는 걱정도 있다고 믿는다. 이 걱정의 바탕은 자기가 남에게 병을 옮긴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일 수도 있고 우애일 수도 있다. (37) 타인의 삶과 죽음을 자기 삶의 지표로 삼는 일에 나는 반대하고 있지만, 어떤 삶과 죽음은 분명 신호이자 메시지이고 그것을 신호이며 메시지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삶은 늘 있다. 이때 발신자는 살거나 죽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속한 사회다. (74) 사람들은 온갖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억은 망각과 연결되어 있지만 누군가가 잊은 기억은 차마 그것을 이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뼈들은 역사라는 지층에 사로잡혀 드러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퇴적되는 것들의 무게에 눌려 삭아버릴 테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 (76) 추운 곳에서는 아 씨발 춥다고 웅크리고 더운 곳에서는 씨발 덥다고 웅크린 채로 그런 장소를 이미 일상으로 겪는 삶과 그 삶을 그런 일상으로 내몬 사람들이며 구조 構造 를 생각했다. (100) 세월호가 맹골수도에 가라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