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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장 이야기 -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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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퇴직 후 얻은 일터에서 '임계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는 '임시 계약직 노인장'이라는 말의 준말이다. 임계장은 '고·다·자'라 불리기도 한다. 고르기도 쉽고, 다루기도 쉽고, 자르기도 쉽다고 해서 붙은 말이다. (7) 내 글이 나이 든 시급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모든 아픔을 온전히 풀어내지는 못할지라도, 나와 동료들이 겪었던 고단함만은 진실하게 담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9) 회사가 주는 것은 딱 하나, 월급뿐이다. (33)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회사의 보급이 전혀 없는 병사들과 같았다. 보급품이 필요하면 자신의 시급을 털어 넣어 조달해야 한다. 시급 일터는 다 그랬다. (35) '임시 계약직'이라는 말에 노인 '장'(長) 자를 하나 덧붙인 것이다. 그러니까 임계장이란 '임시 계약직 노인장'이라는 말이다. 나는 계약직 중에서도 '단기'인 임시 계약직이기 때문에 임계장이 된 것이다. (38) 아파트 경비원 구인 광고에는 "신체가 강건한 자"라는 문구가 많았다. 허약한 노인은 사절한다는 뜻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거칠게 표현하면 그냥 '실팍한 머슴'을 구하는 것이었다. 사지가 멀쩡한 건강한 몸뚱이를 요구하는 것은 임계장류 직종에 공통적이었다. (51) 경비원은 그저 늙은 소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자치회나 관리사무소에 아무것도 바라지 말아요. 빗자루나 걸레 같은 게 닳거든 웬만하면 제 돈 주고 사서 쓰는 게 마음 편할 거요. 그저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일해요. (62) 경비원을 시작할 때 선임자가 해준 첫 번째 충고는 주민과 다투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랬다. 다투면 항상 졌다. 내가 옳으면 주민은 항상 더 옳았다. (69) 잡균과 오물이 묻은 손으로는 밥을 먹을 수 없고, 주민의 심부름도 할 수 없으며, 택배를 다룰 수도 없으니, 하루 평균 손을 씻는 횟수가 서른 번, 어떨 때는 쉰 번이 넘

프로보커터 - 그들을 도발해 우리를 결집하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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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로꾼은 도처에 널려 있고, 앞으로도 계속 출현할 것이다. 선악을 떠나 시선을 끄는 행위 자체가 경제 활동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26)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다수가 먹고살기 위해 돈을 좇는 것처럼, 오늘날에는 주목과 관심 자체가 목적이 되면서 이를 얻기 위한 행보가 곧 경제활동이 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른바 '조회수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다. (34)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는 표현은 대중적 인기로 성패가 결정되는 연예인과 정치인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부고란만 아니면 무조건 언론에 나오는 것이 좋다'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소셜미디어가 전 인류를 '네트워킹' 하면서 이제는 만인에게 무플보다 악플이 나은 시대가 되었다. (41) 데이터 시대 주목경제의 명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관심은 그 자체로 돈이 되며, 주목이 가치를 규정한다. (44) 오늘날 많은 사람이 리뷰·비평·칼럼 등을 읽는 목적은 '나의 생각을 세련되고 시원하게, 설득력 있게끔 정리하고 표현해줄 누군가'를 찾으려는 것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67) 자신의 생각·느낌·의견을 본인 '따르는' 사람에게 '맡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요컨대 사유를 외주화하는 것이다. 사유는 고된 일이다. 사유를 대신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동안 다른 재미있는 일을 하거나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70) 프로포커터는 도발 provoke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인터넷 등지에서 글이나 영상으로 특정인이나 집단을 도발하여 조회수를 끌어올리고, 그렇게 확보한 세간의 주목을 밑천 삼아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79) 정치 불신은 항시적 불안과 혼란을 초래한다. '혐오의 시대'는 이에 대한 반응이다. 다시 말해 불안과 혼란에 대응해 모종의 소속감과 안전감을 얻고자 '우리'와 '그들&#

김동식, 21세기에 우리네 이솝 우화를 쓰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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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죽을 때가 아니라 태어날 때 평점을 받는 선천적 능력주의 세상을 풍자하는 「인간 평점의 세상」, 「시험 성적을 한 번에 올리는 비법」으로 친구마저 굴러 떨어트리는 냉혹한 현실을 그리지만, 성적을 올리기 위해 이혼이라는 쇼까지 벌이는 부모는 절대 되지 말라는 「두 여학생 이야기」. 약한 사람, 아픈 사람을 배려해준 뒤의 공평함이야말로 인간다운 공평함이라는 「단체 감옥」, 시간을 얻기 위해 시간을 버리는 「레버를 돌리는 인간들」, 간절함보다 재미로 뛰는 사람이 이긴다는 「서울숲 게임」, 젊음보다는 재산이 많은 노인이 좋다는 「노인의 손바닥 안에서」. 자살하는 아이들을 구할 수 있게 되자 부모가 영어 유치원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자살을 권하는 「다시 시작」, 성우보다는 말은 더듬지만 공부를 해야 한다며 부모가 말더듬증 고치기를 중단하는 「말더듬이 소년의 꿈」, 소수의 사물에 나타난 숫자가 아이로 변하자 숫자를 지우는 건 살인이라던 시위대도 전국에서 숫자가 나타나자 조용히 해산하는 「카운트다운」, 유기물 집합체 즉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90%의 인류가 사회적 기준과 무관하게 영혼을 가진 사람 10%를 노예로 만드는 「영혼 인간」. 같은 인간을 계속해서 보는 건 재미가 없어 유한한 존재로 만들었다는 신의 「양심 고백」, 동물의 목소리를 바꾸면 반려동물 진료비를 전액 지원하는 삼성 반려동물 보험이 허용되자 두 반려견이 삼성! 삼성! 하며 반갑게 만나고, 쌍꺼풀 수술을 받은 반려인은 삼성, 수술비도, 삼성, 공짜니까, 삼성, 좋아라하며 대화하는 「동물 학대인가, 동물 학대가 아닌가?」. 예전 국민학교는 이솝 우화를 반강제적으로 읽혔다. 교훈은 대부분 권선징악이었지만, 그나마 재미가 있어 읽었다. 《양심 고백》에 실린 스물여섯 편의 짧은 소설은 우리 현실을 재미있게 풍자하지만, 날카롭고 예리하게 철학적 물음을 던지고 화두를 남긴다. 소설은 유쾌하지만 울림은 묵직하다. 읽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긴 소설집 10권을 다 읽을 것 같다. 김동식 작가는 2

사막의 우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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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코 알케트비는 아랍에미리트 남자를 만나 결혼 후 남편의 고향으로 갔습니다. 두바이에서 120㎞ 떨어진 사막입니다. 여름에는 기온이 50도를 넘기도 합니다. 여기서 살기로 하면서 남편과 약속을 했습니다. 절대로 동물을 키우지 않겠다고. 일본에 잠시 다니러 간 사이에 어미를 잃은 갓 태어난 가젤을 남편이 맡기로 했습니다. 젖병으로 키워준 남편을 엄마라고 생각하는지 산책하러 나가면 따라갑니다. 아랍어로 '밤새도록 수다를 떨다'라는 뜻의 '사메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사메르가 9개월쯤 됐을 때 암컷 가젤이 왔고,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인 '다마니'라는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한여름의 사막에서 어린 강아지 2마리와 우연히 만났습니다. 사막에 누군가 버리고 간 강아지였습니다. 다마니가 온 이후로 '동물을 키우지 않겠다'던 약속은 '동물은 어지간해서는 키우지 않겠다'로 바뀌었지만, 기온이 50도에 가까운 사막에 남겨둘 수 없어 집으로 들였습니다. 티니와 타이니 덕분에 사막이 재미있는 일로 가득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동물은 가능하면 키우지 않겠다'로 바뀌었습니다. 거리에서 날개가 부러진 아기 비둘기를 만났습니다. 집으로 데려가는 길에 빵을 씹어서 주었습니다. 아기 비둘기에게 아랍어로 '빵'이라는 뜻의 '쿠브즈'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부러진 날개도 나았고, 매일 산책 비행을 합니다. 떠날 생각은 없어 보이고, 성격이 드세 아무도 쿠브즈에게 이길 수 없는 존재가 됐습니다. '안부 전해줘'라는 뜻의 아랍 말인 '살라미'도 입양했습니다. 사막에도 길고양이는 있습니다. 마당에서 영양실조에 걸린 새끼 고양이와 마주쳤고, 건강할 때까지 보살피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우리집 고양이가 되어 '초비초비'가 됐습니다. 이 무렵 결심은 '동물은 방법이 없으면 들인다'로 바뀌었

능력주의 - 2034년, 평등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엘리트 계급의 세습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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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4년 영국은 지능 검사가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 되어 아주 평등한 능력주의 세상이다. 지능 발달을 예측할 수 있는 연령이 점차 낮아져 2020년에는 3세에도 가능해졌다. 지금은 태아 시기까지 검사가 앞당겨졌다. 1990년 무렵에 아이큐 125 이상인 모든 성인이 능력주의 체제에 속하게 되었다.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영국은 재능 있는 사람에게도 육체노동의 굴레를 씌우면서 자원을 탕진했으며, 자기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시도하는 하층 계급 성원들을 가로막았다. 사회주의자들은 유산 상속에서 생겨나는 종류의 불평등에 반대했고, 사회주의자들이 가장 발전시킨 형태의 평등은 기회였다. 교사들은 무의식적으로 같은 계급 출신 아이들을 선호했고, 구식 시험은 교양 있는 가정 출신에 유리했다. 교육의 질과 양이 모두 지능에 따라 결정되지 않으며 영리한 아이들은 학교를 너무 일찍 떠났고, 우둔한 아이들은 학교를 너무 늦게 떠났다. 지능 검사를 포기하면 다시 필기시험 결과에 의지해야 했고, 필기시험을 포기하면 교사가 작성한 내신 성적표에 의지해야 했다. 편향이 적은 지능 검사야말로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었고, 사회주의자들조차 이런 결과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사회 변화는 경제에서 먼저 생겼고, 압력은 국제 경쟁에서 나왔으며, 동원된 수단은 교육이었다. 기나긴 투쟁 덕분에 사회는 마침내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은 꼭대기로 올라가고 지적으로 열등한 사람은 바닥으로 떨어진다는 원리에 순응하게 됐다. 현대 사상의 기본 원리는 인간은 불평등하다는 사실이며, 사람마다 능력에 따라 인생의 지위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역사적 사명은 능력에 따른 선발의 원리를 새로운 인생관으로 신봉하도록 하는 데 있다. 인간들 사이에 우열이 있다는 사고가 받아들여지자 경제적 진보는 육체노동자가 아니라 새로운 기법을 고안하는 발명가와 조직가 덕분이 됐다. 생산 증대에 기여하는 능력을 지능이라고 하며, 사회는 이 척도에 따라 구성원들을 평가한다. 마침내 임금 인상을 받을 주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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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지혜는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지혜를 운으로 얻으려는 것은 바이올린을 운으로 배우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7) 마루쿠스에게는 침대 밖으로 나갈 사명이 있다. '사명'이지, '의무'가 아니다. 두 개는 서로 다르다. 사명은 내부에서, 의무는 외부에서 온다. 사명감에서 나온 행동은 자신과 타인을 드놀이기 위한 자발적 행동이다. 의무감에서 나온 행동은 부정적인 결과에서 스스로를, 오로지 스스로만을 보호하려는 행동이다. (36) 삶을 성찰하려면 거리를 둬야 한다. 자기 자신을 더 명확하게 들여다보려면 자신에게서 몇 발짝 물러나야 한다. 이렇게 거리를 둘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과 대화는 사실상 동의어였다. (...)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사랑하긴 했지만 그는 대화를 그저 자기 자신이 가진 도구 중 하나로 본 것 같다. 이 모든 현명한 훈수질에는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법을 배웠다. (51) 소로는 다르게 생각했다. 아름다움에 익숙한 사람은 쓰레기장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지만, "흠잡기 선수는 낙원에서도 흠을 찾아낸다." (130) 소로는 월든에서 자유롭게 떠돌면서 스스로를 봄 seeing 에 민감하게 만들었다. 소로는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을 때, 자신과 빛 사이에 아무것도 없을 때 가장 잘 볼 수 있음을 알았다. 소로는 본인을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비본질적인 것들을 다 쳐내고 문제의 핵심으로 치고 들어가는 수학자에 비유했다. (137) 쇼펜하우어는 염세적이었던 첫 번째 철학자도, 마지막 철학자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매우 독보적인 염세주의자였다. 쇼펜하우어의 강점은 우울함이 아니라 우울을 설명하기 위해 쌓아 올린 철학적 체계, 고통의 형이상학이었다. 여태껏 염세

사냥꾼, 목동, 비평가 - 디지털 거대 기업에 맞서 인간적 삶을 지키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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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구상한 이상 사회는 훨씬 더 유명하다. 1845년 브뤼셀 망명 시절 두 사람은 공통된 이상과 인간적인 호감, 그리고 포도주에 흠뻑 취한 상태에서 처음으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렸다. 즉 각자가 오늘은 이 일을 하고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사회, 다시 말해 직업적으로 사냥꾼이나 어부 목동, 비평가가 되지 않고도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낮에는 고기를 잡고, 저녁에는 가축을 몰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하는 것이 가능한 사회가 공산주의라는 것이다. (8) 미래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미래 연구자〉들은 여전히 단상에서 확신에 찬 어조로 예언을 늘어놓겠지만,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어떻게 살게 될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고 싶으냐이다. (17) 테크놀로지가 임금 작업을 대체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테크놀로지가 통제에서 벗어나 지극히 비윤리적인 목적에 사용될 경우이다. 이러한 현상은 안타깝게도 현재의 강력한 사업 모델들에서 이미 자주 볼 수 있다. 섬뜩한 일이다. 작금의 정보 공학자, 프로그래머, 네트워크 디자이너는 더 나은 미래가 아니라 소수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과 공동생활을 정당한 민주적 절차 없이 바꾼다. (39) 20세기 인간들이 살았던 시간과 공간의 좌표는 해체되었다. 인간이 거기서 공유했던 경험과 동질성은 빠른 속도로 지나간 것과 떨쳐 버린 것이 되었다. 지금껏 우리가 알아 왔던 것처럼 디지털화의 열렬한 대변인들은 우리가 취하는 것들이 좋고 옳은지 묻지 않았다. 우리의 기존 가치와 부합하는지도 묻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대의 흐름에 늦지 않게 제때 접속하는 것뿐이다. 이로써 도덕의 문제는 시간의 문제가 되었다. 이제 미래 사회를 결정하는 것은 판단력이나 가치 평가, 동의가 아니라 외부에 의한 강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속도는 도덕성을 뒷전으로 밀어 놓는다.

능력주의와 불평등 -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다는 믿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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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지위 세습에 대해 크게 반발하면서도, 막상 세습과 다르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는 능력주의 시스템에 대해선 지나치게 옹호적이다. 신분제와 세습제라는 것이 절대 악처럼 묘사될수록 능력주의는 절대 선인 양 오인되었던 것이다. (8) 능력주의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같은 인류의 오래된 비례적 정의관에 닿아 있기 때문에 강렬한 호소력을 지닌다. 능력주의에 대한 연구들 중 상당수가 능력주의를 가장한 세습주의, 사이비 능력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결론에 가서 '진정한 능력주의'를 요청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은 그만큼 떨쳐 내기가 쉽지 않다. (9)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활발하게 작동하면서 체제를 정당화한다. 능력주의가 평등을 대체하면서 불평등에 대해 분노하는 운동도 능력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능력주의는 분명히 차별이지만 차별로 인식되지 않고 오히려 '평등', 더 정확히 말하면 '공정'으로 인식된다.(19)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비유는 달리기 등의 경주이다. 이때 우리는 출발선(기회)이 같았는지, 규칙(과정)은 공정한지, 이로부터 도출된 서열과 승패(결과)가 정당한지를 보게 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나 삶은 개개인이 참가하는 경주나 시합이 아니다. 경주나 시합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부일 뿐이다. 사회와 삶 전체를 경주로 보면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의 속도와 기록을 재기 위한 시험과 평가로 생애를 채워 나가야 한다. 불필요한 경쟁과 무의미한 고통이 다수에게 요구된다. 이에 집중하다 보면 평가와 차별의 룰을 만들고 시행하는 권력은 가려지게 된다. (31) 능력의 현실태인 점수는 인간을 오직 하나의 비교 값으로 투명하게 만든다. 한 인간을 둘러싼 가문, 경력, 사상 같은 온갖 요소들을 제거하고 오직 점수로 본인 자신과 혹은 타인과 비교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사람들은 점수를 보면 한 개인의 능력을 직관적으로 안다고 생각하고

시인의 말 - 김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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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새벽빛 그리고 허황들에게 사과하고 싶다 밤의 입국 심사/김경미/문학과지성사 20140825 186쪽 9,000원 왜 그러는가 별은 또 내게 왜 주는가 언제 무엇으로 다 갚으라고 무한대의 빚부터 안기우고 시작하는가 1 이별은 그녀가 사랑을 유지하는 유일한 자세 멀리 떨어지는 것은 누군가를 얻는 유일한 방식 2 아직도 시킨다고 따라나서는 것도 아직도 청춘이 시키는 일이라고 믿는 청춘이 있다는 것도 다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3 너무 재미있어도 고단하다 잦은 서운함도 고단하다 4 누가 누구와 헤어지는 건 언제나 전대미문의 일정이다 5 밤의 입국심사서를 써야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6 음력은 음력대로 양력은 양력대로 충격이어서 피곤한 날은 입술 대신 달력이 부르튼다 7 이목구비에 직업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8 땅 위의 국경들 끝없는 듯해도 발밑은 언제나 같은 물속입니다 9 당신 몰라? 인생은 안 바꿔주는 거요 10 바늘이 무던함을 배워 열쇠가 되었다는데 11 살아온 날의 절반보다 시를 쓴 날이 더 많은 시인에게서만 나는 느낌이 있다. 밤, 청춘, 그리움, 기다림, 자책, 슬픔, 첫사랑, 애인, 이별, 상처, 중년, 실패 그리고 '지나온 날짜들 너무 쓰라리고 갖고픈 날짜들 너무 멀었던'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간이 있다. 시 한 편 한 구절마다 왕성한 청춘까지 반추했지만 끝내 환불을 못 한 중년만 남았다. 지구의 위기가 내 위기인가 자세와 방식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오늘의 결심 전대미문(前代未聞) 연애의 횟수 그의 달력 공부 마흔 세상의 기척들 다시 쓰다 불량품 소사(小史) 열쇠

에세이 만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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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는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살아온 대로, 경험한 만큼 쓰이는 글이 에세이다. 삶이 불러 주는 이야기를 기억 속에서 숙성시켰다가 작가의 손이 자연스레 받아쓰는 글이 에세이다. (13) 잘 팔리는 에세이와 좋은 에세이 사이에는 때론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 둘 사이에 분명한 접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접점을 만들고 찾아내는 일을 나는 편집자로 일하는 동안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14) 책 제목을 뽑아야 하는 이 결정적 순간에는 편집자가 아니라 순수하게 독자로 돌아가야 한다. 에세이 속 문장과 단어를 천천히 즐기고 필사하듯 메모하며, 각각 다른 페이지에서 발견한 단어들을 자유자재로 연결해 보는 이 본문 탐험의 여정은 제목의 역역을 확장해 준다. (37) 누가 훔쳐볼까 무서운 그 실패한 제목들을 볼 때마다 제목은 편집자가 어느 날 번뜩이는 영감을 받아 일필휘지로 짓은 것이 아니라 무수한 삽질 끝에 겨우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이란 생각을 자주 한다. (43) 띠지 문안은 편집자의 간판이다. 독자의 눈에 '띄지' 않으면 띠지가 아니라는 말은 그저 출판계에 떠도는 말장난이 아니다. 띠지 문안을 쓰는 요령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떻게든 이 책이 눈에 띄게끔, 팔리게끔 쓰는 것이다. (46) 책을 파는 일, 특히 에세이를 판다는 것은 과격하게 말하자면 '작가가 제 삶의 일부를 파는 일'이다. 작가의 경험과 삶 가운데 가장 예민하고 잊을 수 없는 부분을 내다 팔아야 한다. 나는 책 만드는 과정에서 그 두려움과 무게감, 그로 인한 파장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와 동시에 작가가 삶의 일부를 떼어 내 만든 책이 외면받지 않고 잊히지 않도록, 어떻게든 독자에게 선택받는 에세이를 만들려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편집자가 힘주어야 할 일이 바로 띠지 문안 만들기다. (53) 좋은 데는 이유가 없어도 되지만, 싫은 것, 불가능한 것, 심지어 디자인을 다시 해야만 하는 상황에는 반드시 근거와 방향

우리가 꿈꾸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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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촛불 이전에 태어났지만 촛불 이후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촛불이 세상을 바꾸었고, 촛불이 변화의 첫 단추를 끼워놓은 상황이지요. 촛불이 우리에게 준 과제는 촛불이 일어났던 원인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불평등을 평등으로, 불공정을 공정으로,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평화의 정착으로,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 떨어진 시대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촛불 후 시대라지만 여전히 함께 살려고 하기보다 우월한 지위와 강한 힘을 이용해서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습니다. 공정의 문제는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 드러난 아주 큰 문제입니다. 공정하지 않은데 뭐하러 노력을 합니까? 편법을 쓰지요. 불공정을 공정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촛불이 우리에게 부여한 역사적 과제인 불공정의 해소, 그 첫걸음은 법원과 검찰을 개혁하여 권력층에 대한 봐주기 수사와 처벌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불평등을 평등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 알아보지요. 제가 지금 이야기한 평등이란 사회적 격차의 해소를 가리킵니다. 격차를 해소할 수 없다면 적어도 완화해야 합니다. 불평등은 다른 말로 '기회의 불균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의 불균등'과는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기회를 받아야 합니다. 적어도 기회는 균등해야 약자와 강자가 공존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회적 격차입니다. 불평등의 해소란 바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는 것, 일자리에서 차별받지 않고 일한 만큼 제대로 받는 것, 그래서 모두가 스스로 노동해서 먹고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불평등의 문제 전부를 최저임금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강자와 약자가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첫걸음은 될 수 있습니다. 호주는 1년에 한 번씩 최저임금을 발표합니다.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호주에서는 정규직 최저임금과 비정규직 최저임금이 따로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비정규직 최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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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혈질이고 매 순간 자기감정에 충실한 손 여사. 고봉밥을 먹는데도 살이 안 찌는 손 여사. 작정하고 한풀이를 할 수 있었던 건 노동의 순간뿐이었던 손 여사. 전라도 사위는 안 된다는 손 여사. 손 여사는 보수다. 정의롭지는 못해도 불의와는 싸울 수 있는 인간 악바리인 딸. 손 여사가 얌체, 똑똑이, 잘난척쟁이라고 하는 딸. 아담과 바라라는 고양이와 십여 년을 함께 사는 딸. 계절의 이름 봄이 아니라 '보다'에서 가져온 '봄'이라는 이름의 딸은 진보다. 자식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절대 무심해질 수 없는 부모의 마음 덕에 딸은 진보의 가치를 접했고, 진보적으로 사고하게 되었다. 다르지만 다른 모습 그대로 함께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게 되었다. 관계는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잊히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 놓쳐버린 관계에 대한 후회가 밀려든다. 딸이 빨갱이라서 빨갱이 좌파 고양이는 안 봐준다는 손 여사가 보수라고 해서 엄마 취급을 안 할 것인가? 손 여사 역시도 딸이 진보라고 해서 딸 취급을 안 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보수 엄마와 진보 딸 사이에 생기는 충돌 사이에서 가족이기 때문에 보듬어야 하는 마음이 있다. 졸지에 아담과 바라가 빨갱이 좌파 고양이가 됐지만 손 여사는 오랫동안 돌봐줬다. 생활형 좌파와 우파는 그렇게 공생한다.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김봄/걷는사람 20200810 176쪽 13,000원

상식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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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선진국에 대한 고정관념을 흔들어놓았다. 한국은 선진국을 무조건 배우고 따라잡으며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 배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또한 우리를 따라 배우는 나라들에게 기준을 제공하는 역할이 주어지기도 하는 때가 온 것이다. (19) 국민소득 3만 불이라 해도 공사장에서 떨어져 죽는 일이 흔하다면 선진국이라 할 수 없다. 또한 부모에게 맞아 죽는 아이가 있는 한 복지국가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생활고로 자살하는 일가족이 있는 한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은 위선이라는 것이다. (78) 〈기생충〉이라는 한국영화에 세계가 환호한다는 것, 그런데 그 작품이 한국 사회 계급갈등의 깊고 어두운 골을 비춘다는 것, 통쾌하면서도 떨떠름한 이 기분은 한국인이라는 이 신나고도 괴로운 신분이 제공하는 아이러니다. (82) 갈등 자체는 강도가 높지 않지만 체감하는 갈등의 강도는 높다는 것. 실제 사회불안요인에 비해 불안심리가 훨씬 과장돼 있다는 것. 그것이 미디어 과밀 사회의 심리적 환경이다. (95) 개화기 이래 우리 역사에서 기자들은 처음엔 '몽매한 민중을 계몽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사회의 지능은 언론과 함께 진화해왔다. 정치가 그렇듯 언론도 그 사회의 수준과 같이 간다. 기자의 질이 떨어지면 사회의 질도 떨어진다. '기레기'라는 멸칭이 유행하는 시대는 기자들뿐 아니라 한 사회로서도 좋지 않다. 기자가 '기레기'라는 말을 들어도 되는 사회라면 그 사회가 거대한 쓰레기장이라는 얘기다. 오랫동안 신문기자들은 정치권력에 순응하든 저항하든 월급이 많든 적든 엘리트 집단이었는데 좋은 의미의 엘리트 의식이 사라지는 건 슬픈 일이다. (128) 정치권력이 부드러운 얼굴을 갖게 되고 절대권력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을 때 공포는 애정이 아니라 혐오와 무시로 바뀐다. 일종의 보복 내지 보상심리다. (151) 군부가 무력화된 시대에 검찰이 정치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검찰에 대한 견제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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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언어가 판을 친다. 이것이 한국 사회의 변혁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다. 거짓 언어로는 현상을 파악할 수 없고, 현상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 (5) 불안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본원적인 힘이며, 사회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숨은 지배자다. 불안은 인간을 길들이고, 소진시키며, 예속시킨다. 불안은 비인간적인 체제를 유지시키고 강화하며, 변혁을 차단하고 저지한다. 불안은 무한 경쟁의 논리 속에서 심화되고 일상화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안은 생명을 죽인다. (27) '인간에 대한 예의'는 우리 사회가 가장 결여하고 있는 품성인 것 같다. 인간을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가 너무도 모자란다. 특히 사회적 약자는 온전한 인격체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감정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비인간적, 비인격적 대우는 상상을 초월한다. 난생처음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에게 "고객님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도록 강요하는 사회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회다. (30)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네 개의 체제를 기축으로 작동해 왔다. 첫째는 정치 영역의 '수구-보수 과두 지배체제'이고, 둘째는 경제 영역의 '재벌 독재 체제'이며, 셋째는 사회 영역의 '권위주의 체제'이고, 넷째는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 체제'이다. 바로 이 네 요소로 구성된 '구체제'가 이 나라를 '헬조선', '절망사회'로 만든 주범이다. 촛불의 외침은 바로 이 구체제를 변혁하라는 것이다. (44) 불안을 통해 지배하는 자는 일상의 미시권력이다. 그들은 공론장의 거시권력보다 힘이 세다. '박근혜 시위'에서 볼 수 없었던 가면이 '조양호 시위'에서 등장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대통령은 내놓고 비판할 수 있어도, 시장은 그럴 수 없다. 광장의 거시권력보다 일상의 미시권력이 더 무서운 것이다. 힘겹게 쟁취한 정치

다정소감 - 다정이 남긴 작고 소중한 감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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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다가 한 시대의 정신으로 각광받으면서 윤리적 노팬티 상태가 패션인 양 포장되며 쏟아지는 무례한 독설들(61)'로 세상에 유해함을 흩뿌리는 시대입니다. 제사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집 여자들이 동원되어 고생해서 만든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나타내는 남녀차별적 의식(79)'이라는 생각을 미처 못했습니다. '남에게 충고를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70)'지 반성했습니다. 여전히 '백지에 별생각 없이 점 하나를 찍고 말 때, 누군가는 그 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긴 선을 그리려 한다는 걸 알아채지(135)' 못하며 사는지 뒤돌아봤습니다. 신파언어차력쇼, 한강의 기절, '하루'라는 음반에 숨겨진 보너스 트랙, 가장 게으른 방식으로 부지런 할 수 있다거나 민폐를 전단지처럼 뿌리고 다닌다거나 국물이 흘러나오고 눈물이 흘러나가면서, 다정한 패턴은 마음의 악력도 만든다는 표현은 역시 김혼비답습니다. 50대가 30대에게 너도 내 나이 돼보면 안다는 거꾸로 인간에게 배웠습니다. 축구를 해서 가장 좋은 점은 집주인이랑 잘 싸우게 됐다는 우아하고 호쾌한 축구인 김혼비가 들려주는 다정에 대한 소감과 감상을 잘 읽었습니다. 김솔통 같은 글을 쓰고 싶은 루브르 언니로 남길 기대합니다. 다정소감/김혼비/안온북스 20211013 228쪽 15,000원

녹즙 배달원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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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젊은데, 언제 멀쩡한 일을 할 거냐는 물음에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녹즙을 배달하는 강정민. 봉급은 최저임금을 1000원 넘을까 말까 하는 수준이지만 미래의 민주시민을 키우는 미인가 어린이집 가짜 양호교사인 김민주. 꼴리는 그림만 그리다가 그림체가 저질스러워졌고, 귀엽고 동글동글한 학습만화용 그림을 그리다 그림체가 호빵처럼 변했지만 웹툰을 그리고 싶은 강정민. 평생소원인 인도에 가서 여행작가가 되려고 코딱지만큼 적금을 붓고 힌디어를 배우는 김민주.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학력이나 지성이 있을 거라고는 절대로 믿지 않는 한국 사회. 대통령 부인처럼 아주 높은 신분이거나, 낮은 데로 임하여 다른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사람들만이 '여사님'이라고 불리는 한국 사회. 피라미드의 맨 마지막에 위치한 배달원들을 탈탈 털어서 위쪽 사람들을 배부르고 따뜻하게 사는 한국 사회. 거지끼리 동냥자루 찢는 꼴을 만드는 한국 사회. 이런 한국 사회에서 돈 적게 주고 감정 소모해야 하는 일은 여자들이 도맡아야 합니다. 여자가 어떻게, 여자가 감히, 그 말에서 모든 여성 억압, 나아가서 범죄가 시작됩니다. 한국이 여자한테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라서 한국에선 여자가 미친년이 안 되면 살지 못합니다. 생각해. 계속 생각해. 생각하는 걸 그만두면, 그때부터는 정말 지는 거다. 여자로 사는 거 힘들다고 생각하는 걸 멈추면, 그때부터는 진짜 지는 겁니다. 나주집에서 순대국을 싹 비운 강정민과 인도로 간 김민주처럼 김현진 작가는 다음 20년도 계속, 쓰길 바랍니다. 녹즙 배달원 강정민/김현진/한겨레출판 20210428 420쪽 14,000원 덧. 오탈자 75쪽 10행 메일이 열어 보니 → 메일을 열어 보니 95쪽 13행 에일에 관한 짧은 시* → 에일에 관한 짧은 시**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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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보다 나아졌다'는 하나의 팩트만이 부유한다면, '그때 그 시절 덕택에' 집집마다 자동차 굴리는 것 아니냐는 사람이 등장한다. 군부독재를 긍정하고 나아가 일제강점기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놀라운 사람이 이 땅에 있는 이유다. (16) 행복과 노력을 결부시키면 위험하다. 특히, 사회가 흔들릴 때의 이런 조합은 '넘어진 사람'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부메랑에 불과하다. 다수의 비극이 소수의 희극에 덮이면 되겠는가. 우리는 결코 공평하게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 불행은 가장 아래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의 삶부터 야금야금 씹어 먹는 굉장히 정직한 녀석이다. (37) 자본주의적 시점에선 신의 한 수였다. 불안한 일자리 형태를 많이 만들수록, 노동자들끼리 다툰다는 예측은 완벽했다. 바늘구멍을 통과한 을(정규직)에게 갑(기업)이 괜찮은 보수를 지급하면, 사람들은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았다'면서 알아서 박수치고 선망한다. 그러면 노동자들 사이에는 공정이란 단어로 포장된 벽이 생겨 을은 결코 섞여서는 안 될 병, 정, 무로 철저하게 구분된다. 그리고 자신이 을 정도는 되리라 희망하는 취업 준비생들은 병, 정, 무의 요구를 마치 자신의 자리를 뺏는 것처럼 느끼며 분노한다. (46) 불평등을 '줄이는' 안목을 키워주는 교육을 고민하지 않고, 불평등에서 '벗어나는' 묘수만을 나열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파할 사람은 다름 아닌 교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극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서 순응하고, 구체적인 절망을 파괴하는 것을 체념한 학생들은 어설픈 희망의 빛에 매료되어 대학의 서열화를 신봉하며, 가족 모두의 힘을 빌려 피 말리는 입시경쟁에 매진할 것이다. (87) 시험의 공정성은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개선되고 있을 뿐이지 절대적일 수 없기에 그 결과로 타인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당연한 것을 가르치지 않았던 교육 시스템에 길들여지면, 논리적으로 사람에 대한 혐오를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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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통해 나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과학적 사고에서는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규칙들을 세우지만 이후 그 규칙들은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다고 본다. 이토록 자유롭게 지식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 나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11) 아인슈타인은 순식간에 앞서갔다. 먼저 고전역학에서의 움직임, 즉 중력이 없는 상태에서 물체들이 보이는 움직임에 대한 설명을 상대화했고(특수상대성이론), 그다음에 중력이 있는 상태에서의 움직임으로 넓혀갔다. 이것이 '일반상대성이론'이다. (36) 공간은 이렇게 일차원 물체인 루프들로 짜여 있으며, 이 루프들이 세 개의 차원상에서 서로 엮이면서 삼차원의 직물을 형성하게 된다. 티셔츠 표면도 멀리서 보기에는 매끄러워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돋보기로 보면 실을 가닥가닥 셀 수 있는 것처럼, 공간 역시 우리 눈에는 연속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매우 작은 차원에서는 각각의 루프를 셀 수 있게 된다. (59) 과학계는 동화 같은 곳이 아니다. 아이디어를 도둑맞는 일은 다반사이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빼앗거나 가장 중요한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등 새 아이디어를 수립하는 최초의 인물이 되려고 기를 쓰고 있다. (64)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그저 과학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일지도 모른다. 과학을 통해 발전된 세계관이 분명하고 정확한 의미에서는 '거짓'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여러 해석을 가질 수 있으며, 각각의 해석들 역시 어느 정도까지만 진실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80) 과학적 사고의 힘은 '실험', '수학', '방법론' 따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힘은 과학적 사고의 특징, 즉 스스로에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이것은 자신이 확언한 내용까지도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며, 자신의 신념은 물론 가장 확실했던 신념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시험대에

스트리밍 이후의 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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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는 전 세계 1억 8000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한 대표적인 글로벌 스트리밍 서비스다. 인터넷 net 과 영화 flick 의 합성어인 넷플릭스는 DVD 유통으로 시작해 전 세계에 콘텐츠를 제공하는 스트리밍 플랫폼 서비스로 성장했다. (8) 넷플릭스를 중심으로 발전한 스트리밍 서비스는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런 서비스를 일컫는 용어 OTT는 'Over The Top'의 약자로 영화나 방송 등 미디어 콘텐츠를 셋톱박스 없이 인터넷으로 연결된 디바이스로 보내는 것을 뜻한다. (14) 리드 헤이스팅스는 "넷플릭스의 경쟁 상대는 수면 시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스트리밍 사업자들이 이용자의 관심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사업자들은 한정된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확보하고 맞춤형 서비스 기능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결국 넷플릭스가 초점을 맞추는 기술과 콘텐츠 투자는 모두 독자의 관심을 겨냥하고 있다. (16) 경쟁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소 가운데 핵심은 가격, 인터페이스, 콘텐츠다. (22) 저널리스트 토드 스팽클러 Todd Spangler 는 넷플릭스가 지속하고 있는 막대한 콘텐츠 투자를 빈지투자 binge-spending 라고 일컬었다. 영상을 한꺼번에 몰아보는 빈지뷰잉 binge-viewing 처럼 대규모 자본을 한꺼번에 투입하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다. (39) OTT가 TV 단말기가 아닌 인터넷을 이용한 동영상 소비를 의미한다면 스트리밍은 동영상을 실시간으로 자유롭게 소비하기 위해 구축된 환경을 의미한다. (50) 스트리밍 시대의 이용자는 소비의 공간뿐 아니라 시간도 선택할 수 있다. 몰아보기가 일종의 사회적 현상이 된 이유도 동영상을 소비하는 문화적 실천 행위가 이용자의 삶에 깊숙이 침투해 이용자의 주도 아래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52) 이제는 누구나 콘텐츠 제작자가 될 수도 있다. 미디어 영역에서 생산자와

로버트 오언 - 산업혁명기, 협동의 공동체를 건설한 사회혁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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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오언은 1771년 영국 웨일스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1858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언은 7세에 학교에 입학했지만 9세에 학교를 떠나 일을 하게 된다. 10세가 되었을 때 런던으로 와 18세까지 점원으로 일한다. 18세에 섬유 기계 공장의 주인이 되고, 29세에 뉴 레너크 New Lanark 에 있는 큰 면화 공장의 경영자가 된다. 오언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기는 초기 산업혁명 시대로 온갖 빈곤과 학대가 넘쳐나던 시기였다. 오언이 태어나기 1년 전에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의 특허권을 얻었다. 애덤 스미스의 《 국부론 》은 1776년에 출간됐다. 18세 되던 해인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터졌고, 면화 산업의 발전을 가능케 했던 새로운 기계들이 널리 도입되던 시기였다. 뉴 레너크의 운영권을 쥐게 된 1800년부터 전국 통일 노동조합이 갑자기 종말을 맞았던 1834년까지 오언은 기념비적인 업적을 이루었다. '뉴 레너크는 공장 개혁뿐만 아니라 동시에 대중 교육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1830~1834년의 사건들을 보게 되면 노동계급이 최초로 이루었던 폭넓은 단결 운동의 지도자'였다. '영국에서 사회주의 운동과 협동조합 모두 공히 그 최초의 체계적인 주창자는 로버트 오언이었다(47)'. 오언은 1800년 1월 뉴 레너크 공장의 최고 경영자가 되자 '뉴 레너크를 단순히 성공한 공장이 아니라 교육 그리고 도덕적 물질적 개혁에 관련된 사회적 실험들을 연이어 계속 펼쳐나갈 실험실로 삼고자(111)' 했다. 당시 공장 노동자들 중에 아이들은 다섯 살에서 열 살 사이였다. '여섯 살짜리 심지어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을 공장에 정규적으로 고용하여 딱 한 번의 휴식 시간만 준채 14시간 혹은 그 이상을 부려먹는 것이 관습이었던 당시'에 오언은 '자기의 공장에 열 살 이하의 아이들은 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고용 금지 연령을 열두 살까지로 올리기'를 원했다.